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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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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년 무신혁명 후 밀장된 조성좌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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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竹先生 작성일26-01-12 20:01 조회127회 댓글0건

본문

1728년(영조4) 무신혁명(戊申革命)<1> 때 경상우도 합천의 핵심 인물인 조성좌(曺聖佐, 1696~1728.4.1) 선조의 시신(屍身)은 밀장(密葬)된 채, 경남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 230-2번지에 잠들어 있다. 무신혁명은 소외계층의 변혁운동으로 평가하고 있다.<2>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 부: 대사헌 이하진)은 성호전집 권53 등과기(登科記)에서 (1728년 영조 4년 3월)무신변란(戊申變亂) 후에 명문거족, 이름난 사람, 유명한 선비, 고관대작, 지위가 미천한 사람을 불문하고 모두가 형벌(刑罰)을 당해 죽었고, 수년 동안 기상이 꺾여 무너진 것이 파멸적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된 것과 진배없다. 오직 우리 여주이씨(驪州李氏)만은 노소귀천 모두 형옥(刑獄)의 죄안에 오른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성호 이익 첫장인 문중인 청주 낭성 고령신씨(申氏)와 둘째장인 문중인 서울 방이동 사천목씨(睦氏), 그리고 성호 자형 문중인 문경-상주-합천(묘산-봉산면) 창녕조씨(曺氏) 대거 가담하여 풍비박산됐다.

그후 59년이 지나 1787년(정조11) 성호 이익 고모부이며 이조판서 정종영(鄭宗榮, 1513~1589) 6세(5대)정득주(鄭得柱, 1685~1703, 장인: 대사헌 이하진, 양자: 정덕주 차남 정희세) 문중이 무신여당(戊申餘黨)이라고 하여 결딴났다. 즉 팔계군 정종영(八溪君 鄭宗榮) 8세(7대)손인 횡성 벽옥정(碧玉亭, 공근면 학담리)의 정무중(鄭武重)과 원주 봉산동의 동생 정현중(鄭鉉重, 1718~1787, 부: 진사 정희기, 조부: 정덕주), 정현종 아들 정진성(鄭鎭星, 1746~1787)과 조카 정진혁(鄭鎭爀, 일명: 鄭鎭一 1747~1787, 부: 鄭冕重, 조부: 정희기, 장인: 안동김씨 김동철) 등이 1787년(정조11) 6월 제천의 김동철(金東喆, 무신혁명 김덕유 11촌 조카)·동익(東翼), 김증열(金曾悅, 일명: 金鎭圭, 김동철 아들), 김성옥(金聲沃, 김증열 아들), 김송대(金松大, 김동철 7촌 조카), 유득겸(柳得謙, 정종영 장인인 유엄후손?), 충주의 동고 이준경(東皋 李浚慶, 영의정) 자손(子孫, 9세손)인 이상겸(李商謙) 등과 함께, 해도(海島, 섬)에 정배돼 있는 1728년(영조4) 무신변란 정희량(鄭希亮, 1685?~1728)의 손자 정함(鄭醎, 일명: 정응주·鄭應周, 부: 鄭鐵興) 이인좌(李麟佐, 1695~1728)의 아들 및 손자를 추대하여 군사를 일으키려다 처형 또는 정배된다. 1728년(영조4) 3월 당시 이인좌의 네 아들은 이중명(李中明, 12세)·문명(文明, 9세)·화명(化明, 6세)·인명(仁明, 2세)인데, 15세(만14세) 이하인 관계로 교살되지 않고 함경도 온성부 및 회령부에 관노로 발배됐었다.

이처럼 1728년 무신잔당(戊申殘黨, 제2 무신거의)이라고 하여 큰 화(禍)를 입은 성호 이익 고모부 정득주(鄭得柱, 동생: 정덕주<鄭德柱, 장인: 성호 6촌형 李溭>, 장인: 성호 아버지 이하진)의 초계정씨대제학공파(관동파)는 폐고(廢錮)됐다.

또한 이조판서 항재 정종영(恒齋鄭宗榮, 6세손: 정득주·덕주) 맏사위가 최경상(崔景祥)인데, 최경상 증손인 원주 출생 최동익(崔東益, 1641~1705, 생원)은 1728년무신변란 핵심 인물로 참수된 이천(利川) 거주 유명한 한의사 임서봉(任瑞鳳, 1678~1728, 묘소: 이천시 부발읍, 5대조: 북인 이조판서 임국로)의 장인이다. 최경상 아버지는 최수증(崔壽嶒, 군수), 조부 최세절(崔世節, 1479~1535, 호조참판)이며 증조는 최응현(崔應賢, 1428~1507, 병조참판)이다.

정종영 장남인 정약(鄭爚)의 막내사위가 이인좌(李麟佐, 1695∼1728)의 증조부 이응시(李應蓍, 1594~1660, 이조참판)이고, 이응시 손위동서 의금부도사 한복윤(韓復胤, 1574~1660, 정약 둘째사위)은 한악(韓渥) 10세(9대)손이고, 무신혁명 핵심 인물인 원주 출생 한세홍(韓世弘, 1685~1728)은 16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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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좌(曺聖佐, 1694~1728.4.1) 묘소: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산 230-2번지 창녕조씨대장군공파 선산!

朝鮮戊申義擧大將軍昌寧曺公諱聖佐之墓(조선 무신의거 대장군 창녕 조공 휘 성좌지묘)

公의 諱는 聖佐요 姓은 曺氏인데 本貫은 昌寧이다. 始祖는 昌城府院君 太師 諱 繼龍이다.

公의 八代祖考 退憂堂 昌城君 諱 繼衡은 戶曹參判으로 淸白吏였고 諡號는 昌城公이며 配位는 貞夫人 益山李氏다. 六代祖考는 曾左承旨 諱 夢吉이고 그 配位는 曾淑夫人 平山申氏로 그 父는 松溪 申季誠이다. 五代祖考는 大邱府使 陶村 諱 應仁인데 來庵 鄭仁弘과 寒岡 鄭逑 兩門의 弟子로서 壬辰倭亂에 倡義하였고 配位는 淑夫人 全義李氏다. 高祖考는 知制敎 定州牧使 梧溪 諱 挺立이고 配位는 淑夫人 安東權氏로 그 父는 花陰 權瀁이다. 曾祖考는 梁山郡守 雪洲 諱 時亮이고 配位는 令人 坡平尹氏로 그 祖父는 秋潭 尹銑이다. 祖考는 成均生員 通德郞 諱 夏全이고 配位는 恭人 安東權氏로 그 祖父는 東溪 權濤다. 皇考는 諱 沆인데 布衣였고 妣는 孺人 慶州金氏로 그 曾祖父는 澗西齋 金德民이다.

公은 肅宗22年(1696) 丙子에 生하여 英祖4年(1728) 戊申 四月 一日에 卒하였다. 配位는 宜寧南氏(擬)다.

光海君과 北人政權의 改革政治에 不滿을 품은 西人의 保守勳戚 勢力이 仁祖反正(宮庭反亂)을 일으켰다. 以後 西人과 南人의 黨爭이 激化되고 肅宗20년(1694) 甲戌獄事로 西人의 老論政權이 一黨專橫하면서 百姓들의 삶이 疲弊되었으니 그 徵候가 바로 平安과 海西에서 大盜 張吉山의 出現과 湖南과 嶺南의 土賊들이 猖獗하였고, 서울 鐘路街 掛書事件 등이 頻發하였다.

老論勢力은 景宗을 謀害하여 當時 延잉君(英祖)과 弑逆에 加擔하고 英祖가 肅宗의 王子가 아니라 勳戚인 金春澤의 씨라는 說이 流布되자 南人과 少論 그리고 一部 北人 殘餘勢力의 名門鉅族 後裔들이 昭顯世子의 曾孫인 密豊君 坦을 推戴하고자 京鄕各地(20餘 郡縣)에서 相互連絡하여 蜂起하였으니 李麟佐 鄭希亮 申天永 李思晟 朴弼顯 羅崇坤 曺世樞 南泰徵 李志仁 閔觀孝 鄭世胤 權瑞鳳 趙상 李河 등 主導層만 70餘人을 헤아리고 軍士는 數千에 이르러 瞬息間에 蜂起地域 隣近 고을이 陷落되었으니 곧 戊申義擧(戊申亂)다.

公은 大將軍 稱號를 갖고 民心을 얻어 合勢한 軍馬勢力을 出動하여 陜川과 三嘉 고을에 無血入城하였다. 그러나 湖南과 慶尙左道 勢力의 蜂起가 如意치 못하고 離脫하여 南下하는 官軍에 合勢하여 都巡撫使 吳命恒이 湖西의 李麟佐軍을 鎭壓했다는 消息에 動搖한 部下의 背反으로 公의 軍陣도 허물어져 義擧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朝廷에서는 平嶺南碑를 세우고 晉州 등 慶尙右道에 대해서는 向後 50年間 停擧하였다.

純祖年間에서부터 高宗年間 近 百年間에 걸친 平安道農民戰爭(洪景來亂) 壬戌農民抗爭(晉州民亂) 甲午東學農民戰爭(東學亂) 등 一連의 民衆蜂起는 바로 戊申義擧에서 發端起因한 것으로 歷史發展에 큰 意義가 있다고 思料된다. 日帝時代 3.1 萬歲運動 때 晉州 陜川 三嘉地域이 餘他地域과 달리 迅速하게 大規模로 發生한 것도 國家와 民族이 危機에 處할 때 正義에 殉하는데 앞장서는 精神이 어찌 公의 意氣와 無關할 것인가.

儒學을 修學한 몸으로 修己治人을 宗旨로 與民同樂하고 先憂後樂하나니 公의 義擧는 이에 合當하다. 公의 後孫으로는 長子 仁燁과 次子 信燁을 두었고 長孫인 範敬(敬源)에서부터 有喆 錫圭 相淳 再建으로 이어져 八世宗孫 柄溶이 있다.

이에 다음과 같이 銘한다.

나라의 東南쪽 고을에 名門世家의 後裔로서 / 東南之鄕 名門世族

敬義를 精誠으로 崇仰하여 祖上의 訓戒와 가르침을 이어 지켰다. / 誠敬崇義 承訓守敎

呂政과 黃歇의 때를 당하여 先王 景宗을 위하여 復讐雪恥 하렸니 / 政歇之際 雪恥懿陵

民心의 뜻은 이미 얻었으나 天命은 아직도 바꿔지지 않는구나. / 民意己得 天命未革歲在 

己卯(1999年) 孟春 二月 日  哲學博士 安東後人 權 仁 浩 謹撰

조성좌·정좌·덕좌(曺聖佐·鼎佐·德佐)1728년(영조4) 4월 1일 새벽 빙고현(氷庫峴, 합천객사 서쪽 모퉁이 앞 합천리 477-50번지 옥산동산)에서 죽임을 당했는데,시신(屍身)수습하여 머구재(먹우재, 합천읍 서산리 오현동)→흰바우(합천읍 장계리 백암)→인곡재(합천읍 인곡3길 영화동)를 넘어→권빈역(봉산면 권빈리)→석가산 230-2번지(봉산면 권빈리)로 옮겨와 묻었다.

조성좌·정좌·덕좌·명좌 선조 등이 3월 21일 고향 묘산에서 4천 군사로 기병한지 9일이 지난 4월 1일 새벽에 거사군 측 장교 김계 하세호 및 아전 이태경 등이 배신-시해(弑害)하여 빙고현(氷庫峴, 합천군 관아 얼음 저장소 언덕)에서 조성좌·정좌·덕좌 선조가 죽임을 당했다. 조성좌공 6촌동생 조명좌(曺命佐)는 1728년 4월 28일 대구감옥에서 처형됐다.

빙고현에서 석가산 묘소까지 직선거리로 11.7km 남짓된다. 석가산에서 조성좌 생가(生家)와는 9.6km 떨어져 있다.

조성좌 선조의 묘소는 고조부인 정주목사 오계 조정립(梧溪 曺挺立, 1583~1660)이 별세한 곳인 봉서정(鳳棲亭, 1644년 건립)을 굽어보고 있다. 단장하기 전에는 어린애 무덤보다도 더 작고 초라하게, 돌과 흙으로 덮은 무덤이었다.

조성좌 묘소는 1999년5월 23일(일) 단장하기 전까지, 40m 낭떠러지 연소혈에 협소하게 놓여 있어 엎드려 절도 하지 못했다. 이 골짝을 '귀신골'로 부르고 있다.

석가산(石加山) 묘소에서 조성좌 후손들이 살고 있는 합천군 삼가면까지는 42km(100리) 거리인데도, 1930년 10월 28일 종손(宗孫) 조재건(曺再建, 17세) 명의로 소유권 보존등기하여 정성스럽게 성묘하며, 묘지기(김봉 거주 조계하(曺啓荷, 1889~1956, 조시적 7세손)→아들 윤문(玧文)→아들 상환(尙煥, 1948~))까지 두고 관리했다. 이게 정의(正義)이기도 했고, 무신혁명을 결코 잊지 않고 선명하게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다.

[석가산 묘소에서 18km 떨어져 있는 조성좌 아들(인엽·신엽과 배위) 묘소(신원면 구사리 원만-元萬마을 산 100번지)도 1919년 4월 25일 소유권 보존등기했다. 원만마을 김윤진 조부 때부터 묘소를 관리했다. 1744년(영조20)쯤 방면된 조성좌 아들들은 월여산 밑 원만마을에서 살았다.]

이 작고 초라하고 형편없기(?)까지한 '조성좌 무덤'을 성소(聖所)처럼 보존한 것이다. 100리나 떨어진 삼가(三嘉) 후손들이 말이다. 물론 조성좌 묘소 90m 우측에 위치한 10촌 형님 조정좌(曺鼎佐) 묘소(밀양손씨와 합분)와 친동생 조덕좌(曺德佐)묘소도 성의 있게 돌봤다. 석가산 앞산 219번지 무덤 3기(조성좌·덕좌 배위? 등)도.

‘석가산의 쇠갓’이라는 조성좌 전설이 서려 있는 석가산 일대는 종조부모인 조하현 및 배위 고령박씨 묘소가 있는 등 창녕조씨에게 선산(先山)과도 같은 곳이다.

1914년에 태어난 조성좌의 종손(宗孫)을 '재건(再建)'이라고 이름 지은 것도 "1728년 무신혁명 이전의 명문세가로 '재건(再建)'하려는 간절한 염원"때문이다.

*이 블로그 '창녕조씨족보(1835년)와 1728년 무신혁명, 정배죄인들의 동향' 참조: https://blog.naver.com/antlsguraud/221145725331

*주: <1>1728년(영조4) 3월무신년 봉기이인좌 정희량 이유익 임서호 정팔룡 조성좌 등 주체세력들이 기존 성리학(주자학) 중심의 이념과 신분질서를 변화시키려 했고, 지방의 수령·병사(兵使)·중군(中軍) 등을 임명했으며,‘제역감역(除役減役)·불살읍쉬(不殺邑倅)·불살일민(不殺一民)·불탈민재(不奪民財)·물겁부인(勿怯婦人)·환곡호궤군병(還穀犒饋軍兵)’실천 강령을 채택하여 시행했기 때문에 ‘무신혁명(戊申革命)’이라고 명명했다. 이른바 무신란(戊申亂, 이인좌의 난)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무려 1천여 번이나 나온다.

<2>"무신변란(戊申變亂)은 조선후기 정치·사회체제의 구조적 한계와 모순으로 인해 일어난 의리명분 논쟁의 한 양상이면서 동시에 대규모적인 권력투쟁의 표출이기도 했다. 분출된 각 계층의 저항 세력이 왕조 교체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지속적으로 정권 교체를 지향했다. 아무튼 무신란은 소외계층의 변혁운동이었다"고 평가했다. (무신역옥추안 해제, 국사편찬위원회, 1994년)

1728년 3월 무신혁명 실패로 처형된 사람이라도 그 집안에서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게 했다. 무신혁명 때 나주(羅州) 명문거족으로 핵심 인물인 나두동(羅斗冬, 71세, 증조: 보은현감 나덕준)은 압송돼 서울 국청(鞠廳)에서 1728년 6월 19일 장살(장폐)됐다. 그의 시신을 남원(南原)으로 운구해 와 매장(埋葬)할 때, 남원현감 최집(崔집, 1730년 남원현감 파직됨)까지 나서서 '역군(役軍: 일꾼)을 많이 주고 별도의 환곡(還穀)을 넉넉히 제급(題給)'했다. 또한 '읍민(邑民)의 집안 산(山)을 곤장을 때려 빼앗아서 나두동 장지(葬地)로 삼게 하고, 관고(官庫)의 짚자리를 실어 운반하여 제청(祭廳: 제각)까지 덮게 했다'고 해서 파직됐다. 고을 수령까지 나서서 매장을 도와 주었다는 것은 당시 민심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무신역옥추안 영조 4년 1728년 6월 19일, 영조실록 9년 1733년 4월 13일]

조성좌 아내와 어린 아들 및 친척·조카들이 강원도 낭천(狼川: 화천)과 인제(麟蹄)·양구 및 인천 백령도·황해 초도(椒島)·전남 고흥 녹도진(鹿島鎭)·진도 등지로 유배된 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대명률(大明律) 및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연좌된 사람의 자녀 중 16세(만15세) 이상만 처형했고, 16세 미만과 아내 및 부모는 정배(定配) 또는 방면(放免)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728년 7월 및 1729년 3월 현재 무신변란에 연좌된 사람들을 다 연변(沿邊)에 뒀는데, 국정 안정에 가장 염려스러워 점차 평민을 만들어 신실(信實)한 고을로 옮겨 두고 수령들이 검찰하게 했다. 변방과 도서(島嶼) 등 8도에 유배된 사람만 1천 명이나 됐기 때문이다.

조석좌(曺錫佐, 1687~1727, 조숙 장남, 조성좌 10촌형) 둘째 아내인 은진송씨삼가공파 송종애(宋從愛, 진잠·회덕 출생, 조부: 진주 단목 진사 하명·河洺과 소통한 참봉 송규창)는 발배 후 15년이 지난 1743년(영조19) 6월 5일면천(免賤)하여 평민으로 방면됐다.

또한 “각 도(道)에 모든 가족이 정배(定配)된 사람들은 금번(1744년 7월 6일, 1735년 2월 5일)에 이미 내(영조)가 명(命)하여 형률을 고쳐서 죄의 등급을 감형하게 했는데, 마땅히 이를 도류안(徒流案: 노역 및 정배 형벌을 적은 명단)에 옮겨 기록해야 한다.”고 영조가 윤허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요절한 동계 정온 종손(宗孫) 정의호(鄭宜瑚, 1698~1716, 정희량 장조카, 동계 6세손) 밑으로 정의호 21촌 정계주(鄭繼胄, 1719년생)를 1738년(영조14) 11월 입적하여 동계 정온(桐溪 鄭蘊, 1569~1641) 제사를 받들게 했다.

영남 제일 거부(巨富)인 조하주(曺夏疇, 1650~1725, 참판 조탁 증손)의 계배 연안나씨(延安羅氏, 52세)1728년무신혁명 실패 후 증손 응창(應昌, 2세, 조세추 아들)과 손자며느리 남양홍씨(南陽洪氏, 조세추 아내, 응창 어머니, 조부: 이조판서 홍우원, 부: 홍항)와 함께 함경도 길주목에 정배됐는데, 연안나씨 남편 조하주와 함께오포읍 신현리 산 104-2번지에 묻혔다. 조언박(曺彦博, 호조좌랑) 묘소 밑에 합장한 것이다.

또한 경창군 이주(慶昌君 李珘, 1596~1644, 부사 조명욱 사위) 후손(동부승지 이게)들의 도움에 힘입어 조몽정→조탁→조명욱→조실구→조하장·하주 봉사손으로1744년(영조20) 조명우(曺命佑, 1694~1758, 조실원 손자, 조하장 5촌조카)를 입적시켰다.

이는 감형돼 양인(良人, 평민)으로 방면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이뤄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안동권씨족보 1권 추밀공파보(樞密公派譜) 412쪽에 따르면, 무신혁명 때 장폐된 충청감사 권첨(權詹, 증조: 권전·權佺)은 그의 증손 권완(權浣, 1763~ ?, 일명: 인손·仁孫)이 정배죄인 조선(趙銑)-조분순(曺分順, 처형된 조세추<曺世樞, 1703~1728>>)의 사위인데, 권완은 정배죄인으로 정배지인 함경도 길주에 살았다. 권완(權浣)-순창조씨(淳昌趙氏, 趙銑-曺分順)묘소길주목 길성면 홍수동 형제봉 계좌(癸坐)에 있다는 것도 족보에 기록하고 있다.

승정원일기 영조 4년 1728년 6월 23일조에 처형된 조명규(趙命奎, 처형된조관규 동생) 조카인 조선(趙銑,일명:조항)함경도 안변부(安邊府)로 정배된 것으로 나와 있는 것과 맥락이 같다. 창녕조씨족보(1835년) 5권 11~13쪽과 안동권씨족보(1961년)에 등재된 것처럼 정배죄인(定配罪人)들 끼리 결혼하는 등 교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권완(權浣, 권첨 증손) 어머니 해주정씨가 고향(서천군 판교면-화양면)에서 사망하자, 어머니 묘소를 자신이 정배돼 뿌리를 내린 함경도 길주목 길성면 홍수동 형제봉에 썼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1395년 태조4년 발간) 권18 형률(刑律)-도적(盜賊)-277조 모반대역·謀反大逆(규장각, 2001), 조선후기 단성 지역 정배인의 존재 양태(심재우, 한국학보 27권 1호, 2001), 박문수 장계 무신 1728년 6월 22일, 영조실록 4년 1728년 7월 23일, 영조실록 5년 1729년 3월 11일, 박문수 장계 기유 1729년 7월 22일, 승정원일기 영조 11년 1735년 2월 5일, 승정원일기 영조 19년 1743년 6월 5일, 승정원일기 영조 20년 1744년 7월 6일, 영조실록 20년 1744년 8월 4일, 창녕조씨족보(1835년) 5권, 안동권씨족보 1권 추밀공파보(樞密公派譜, 1961년)]

※이를 종합적으로 세밀하게 고증한 졸저 《1728년 무신봉기와 300년 차별, 조찬용, 학고방, 556쪽》을 2012년 8월 15일 출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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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년 무신봉기와 300년 차별, 조찬용, 학고방, 556쪽》이다. 독수리 타법으로 글을 작성하고, 퇴고(推敲)도 모두 내가 했다. 물론 책 속에 있는 이미지들-책 표지도! 미국 하버드대학교 도서관과 미국 스텐포드 대학(Stanford University) 도서관, 일리노이 주립대학 도서관, 국립 오스트레일리아대학 도서관(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일본국립국회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국회도서관, 서울대 등 국내 대학 도서관에서도 대부분 구입해 갔다. 교보문고-예스24 등에서도 나름 팔리고 있다. Harvard Hollis number: 99013394604020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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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3월에 발간했다. 총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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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2001년, 2003년 출간한 《1728년 무신사태 고찰, 조찬용, 아이올리브, 226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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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 전, 봉산면 김봉리 석가산 230-2번지 대장군 휘 성좌(聖佐) 묘소다. 합천호 수몰 전이라 위 좌측에 좁은 비포장 신작로가 보인다. 합천 또는 대구에서 봉산면 김봉을 경유하여 거창으로 가는 신작로(新作路, 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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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 전 조성좌(曺聖佐) 묘소: 경남 합천군 봉산면 귄빈리 석가산 230-2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밀장(密葬)이기 때문에 무덤 곳곳에 돌[石]이 덮여 있고, 어린애 무덤보다도 작다. 낭떠러지에 너무 협소해서 엎드려 절도 못했다. 1930년 10월 28일 조성좌 선조의 종손(宗孫)인 재건(再建, 17세) 명의로 소유권 보존등기했다. 1914년 태어난 종손(宗孫)을 '조재건(曺再建, 1914~1984)'으로 조부(祖父, 조석규 1854~1917)가 이름 지은 건 1728년 무신혁명 이전 번창했던 가문을 '재건(再建)'하려는 염원 때문이었다. 또한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고 목숨까지 던진 위대한 정신과 살아남은 후손들에게 가해진 폭력적 고통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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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 전 조성좌(曺聖佐) 묘소: 경남 합천군 봉산면 귄빈리 석가산 230-2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밀장(密葬)이기 때문에 무덤 곳곳에 돌[石]이 보인다. 연소혈(燕巢穴)에 자리하고 있어서 엎드려 절조차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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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좌 묘소 밑에 합천호 물이 보인다. 묘소 축대 앞은 40m 낭떠러지다. 1999523() 단장할 때 묘소 앞 호수쪽으로 2.5m 넓혀 축대를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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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위 화살표: 조성좌 무덤 축대와 비석이 보인다. 1999년 5월 묘소 단장 전에는 이곳 좁은 급경사 오솔길로 올라가서 성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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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좌 무덤에서 오른쪽 40m 낭떠러지 밑에 물(합천호)이 보인다. 오른쪽이 물(합천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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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년(영조4) 4월 1일 빙고현(합천리 477-50)에서 거사에 적극 가담한 장교 김계 하세호 및 아전 이태경 등이 배신-시해(弑害)하여 죽임을 당했다. 조성좌·정좌·덕좌 시신을 수습하여 먹우(머구)재(합천읍 서산리 오현동)→인곡재(합천읍 인곡3길 영화동)를 넘어→권빈역석가산 230-2번지로 옮겨와 묻었다. 빙고현에서 묘소까지 직선거리로 11.7km 남짓된다. 가운데 위쪽 빨간 점조성좌 선조 생가다. 묘소는 생가(生家)로부터 9.6km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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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합천댐 건설로 수몰되기 전 경남 합천군 봉산면 김봉마을이다. 우측 끝에 봉서정이 보인다. 인접한 산(山)이 석가산이다. 이 석가산1728년(영조4) 무신혁명 주동자인 조성좌·정좌(배위 밀양손씨)·덕좌 묘소(권빈리 석가산 230-2)와 조부 및 종조부인 조하전(함창김씨)·하현(고령박씨)·홍묵(하현 현손) 묘소(압곡리 석가산 79-5)가 있다. 좌측 위에 보이는 도로 좌측 쪽이 아랫 김봉이다. 1986년 수몰로 인해 봉산면에서 970세대 4,074명이 고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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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산의 쇠갓’이라는 조성좌 전설이 서려 있는 석가산 전경이다. 단장한①조성좌묘소(권빈리 석가산 230-2), ②조정좌(밀양손씨)·덕좌 묘소(석가산 230-2), 조하전(함창김씨)·하현(고령박씨)·홍묵(하현 현손) 묘소(압곡리 석가산 79-5), 오도산이다. 조성좌 묘소 좌측 능선 끝자락 밑에 1986년 수몰된 봉서정(鳳棲亭)도촌별묘(陶村別廟)가 자리하고 있었다. 조성좌 6촌동생인 조명좌(曺命佐)는 1728년 4월 28일 대구에서 처형됐는데, 조명좌가 만약 조성좌-정좌-덕좌와 함께 4월 1일 합천읍 옥산동 빙고현(氷庫峴)에서 처형됐다면, 지금 조명좌 묘소가 있는 묘산면 도옥리 177번지 개정지(介亭地)로 가지 않고, 위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 230-2번지에 함께 묻혔을 거다. 조정좌 배위 밀양손씨는 성주에서 1728년 5월 8일 교형(絞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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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빨간 화살표:정주목사 오계 조정립(梧溪 曺挺立, 조성좌 고조) 유허비(遺墟碑, 1994년 5월 건립), 우측 빨간 화살표:1728년 3월 무신혁명 조성좌 묘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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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23일(일) 무신의거비 제막식 현수막이다.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삼거리, 조성좌 선조 묘소 가는 쪽 입구 도로변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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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거비 제막식 당일 배부한 팸플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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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23일(일)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 조성좌 묘소에서 '무신의거비 제막식' 순간이다. 서울 조흥은행에 다니는 의용이가 촬영했다. 우측부터 상주 규팔 일가, 동철 아재, 운용兄, 상주 영진 일가, 권인호 박사(안경), 청주 사순 일가(푸른 앙복), 성남 희도 일가, 종손(宗孫) 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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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23일(일) 경남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 조성좌 묘소에서 '무신의거비 제막식' 때다. 권인호 박사가 비문을 낭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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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년(영조4) 무신혁명 발발 271년이 경과한 뒤 21세기를 앞두고, 1999년 5월 23일(일) 경남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 조성좌 묘소에서 '무신의거비 제막식' 때다. 종손(宗孫) 병용(柄溶)이 고유문(告由文)을 낭독하고 있다. 대장군公 휘 성좌(聖佐) 후손들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극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합천군 삼가면에 정착한 후, 역사의 진실과 뿌리를 잊지 않고 집요하게 매진한 결과다. 웃대로부터 전해 온 얘기에 따르면, 1728년 무신혁명인엽(만래(내), 휘 성좌 장자) 할배는 어머니 및 동생들과 강원도로 정배되고, 거제 등 섬으로 갔다가, 삼가현 신원면 구사리 옛 원만마을로 이주한 뒤, 삼가현 가회면 도탄리 구송정마을에 잠시 거주한 후, 삼가현 안구마을을 거쳐 삼가현 강성마을 및 이부마을에 정착했다. 그 사이 인엽 할배 맏아들 범수(範守)는 '체장수'를 하며 의령 등지로 떠돌다가 소식이 두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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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23일(일)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 조성좌 묘소에서 '무신의거비 제막식' 때다. 우측부터 운용兄, 상주 규팔 일가(한복), 상주 영진 일가, 청주 사순 일가(푸른 양복), 재민 재당숙, 동진 아재, 동철 아재, 병용兄, 인용兄, 환용, 성남 희도 일가, 우용, 관용, 나(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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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25일(화) '무신의거비 제막' 관련 경남일보 기사다.

*이 블로그 '1999년 5월 조성좌公 무신의거비(戊申義擧碑) 제막 전후!' 참조: https://m.blog.naver.com/antlsguraud/221924816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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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22일(토) 오후 8시 KBS1TV 역사스페셜 방영 때 캡쳐 화면이다. 1728년(영조4) 4월 1일 빙고현(합천리 477-50번지)에서 조성좌·정좌·덕좌 시신을 수습하여 인곡재(계산리 남계마을)를 넘어→권빈역석가산으로 옮겨와 묻었다. 직선거리로 11.7km 남짓된다. 특히 조성좌 시신은 협소한 연소혈에 밀장한 관계로, 묘소 단장을 했는데도 무덤 뒤쪽이 없어서 언덕배기에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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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1TV 역사스페셜 방영 때 필자: 2003년 3월 22일(토) 오후 8시 방영 캡쳐 화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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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1TV 역사스페셜 방영 화면이다. 2003년 3월 22일(토) 오후 8시 방영했다. 좌측 아래 화살표는 묘산에서 봉산 귄빈리 및 거창읍으로 가는 신작로(新作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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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1TV 역사스페셜 방영 화면: 2003년 3월 22일(토) 오후 8시 방영했다. 조성좌 묘소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가운데 아래 신작로는 묘산에서 봉산 귄빈리 및 거창읍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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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1TV 역사스페셜 방영 때: 2003년 3월 22일(토) 오후 8시 방영 캡쳐 화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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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 조정좌(曺鼎佐, 밀양손씨 합분)-조덕좌(曺德佐)묘소표지석합천호가 보인다. 조성좌 묘소 가는 길이다. 1999년 5월 묘소 단장할 때 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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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戊申義擧 大將軍 昌寧曺公 諱 聖佐之墓(조선 무신의거 대장군 창녕조공 휘 성좌지묘)! 271년 동안 무덤 앞 공간이 상석 앞까지만 돼 있었는데, 1999년(일) 5월 23일 단장할 때 위 사진처럼 묘 앞쪽으로 2.5m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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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바라본 조정좌(曺鼎佐, 밀양손씨와 합분, 좌측)와 조덕좌(曺德佐) 묘소: 석가산 230-2번지다. 조성좌 묘소 약 90m 우측 아래에 있다. 수몰 위험으로 1985년 5월 25m 위쪽으로 이장했다. 사진 좌측 약 90m에 조성좌 묘소가 있다. 우측 위 멀리 보이는 산이 오도산이다. 사진 가운데 쯤 맨 아래에 김봉-거창으로 가는 옛도로(신작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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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좌(曺鼎佐, 밀양손씨 합분)-조덕좌(曺德佐) 묘소다. 좌측 위에 합천호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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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혁명 조정좌(曺鼎佐) 및 밀양손씨 묘소(합분)다. 상석(좌측면): 1999年 4月 八世從孫 柄溶 謹竪(1999년 4월 8세종손 병용 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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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좌(曺德佐) 묘소다. 상석(좌측면): 1999年 4月 日 八世從孫 柄溶 等 謹竪(1999년 4월 일 8세종손 병용 등 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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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좌(曺鼎佐, 밀양손씨와 합분, 좌측)와 조덕좌(曺德佐) 묘소: 석가산 230-2번지다. 조성좌 묘소 약 90m 우측 아래에 있다. 수몰 위험으로 1985년 5월 30m 위쪽으로 이장했다. 이장 때 조정좌(합분) 무덤에서는 긴 머리카락만 일부 나왔고, 조덕좌 무덤에도 뻐 한 조각 나오지 않았다. 조성좌 수급 등 조정좌·덕좌 수급을 함양에 내려온 사로순무사 오명항에게 갖다 바쳤기 때문이다. *좌측 표지석(앞면): 朝鮮 戊申義擧 將軍 昌寧曺公 諱 鼎佐, 配位 密陽孫氏之墓 合墳(조선 무신의거 장군 창녕조공 휘 정좌, 배위 밀양손씨지묘 합분),*좌측 표지석(뒷면): 무신의거는 평안도 농민전쟁 진주농민항쟁 동학혁명 등 조선후기의 민중운동을 비약적으로 촉발시킨 역사적인 일대 사건임을 깊이 새기면서... 一九九七년 八月 八世從孫 柄溶 浩溶 雲溶 灒溶 觀溶 等 謹竪(1997년 8월 8세종손 병용 호용 운용 찬용 관용 등 근수), *우측 표지석(앞면): 朝鮮 戊申義擧 副將軍 昌寧曺公 諱 德佐之墓(조선 무신의거 부장군 창녕조공 휘 덕좌지묘), *우측 표지석(뒷면): 一七二八年 英祖 四年 老論 一黨 獨裁 地域差別 抗拒하여 起兵하신 높은 뜻을 깊이 새기면서... 一九九七年 八月 八世從孫 柄溶 仁溶 文溶 皓溶 等 謹竪(1728년 영조 4년 노론의 일당 독재와 지역차별에 항거하여 기병하신 높은 뜻을 깊이 새기면서...1997년 8월 8세從손 병용 인용 문용 호용 등 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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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좌(曺鼎佐, 밀양손씨와 합분, 좌측)와 조덕좌(曺德佐)공 묘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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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 위험으로 1985년 5월 30m 위쪽으로 이장하기 전 조정좌(曺鼎佐, 밀양손씨와 합분)-조덕좌(曺德佐) 묘소가 있었던 자리다. 묘소 옆에 아름드리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묘지기 조상환이 자신의 아버지 관(널)으로 사용하려고 무단으로 베 버렸다. 무척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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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좌 배위(의령남씨?, 좌측)·조덕좌 배위(?, 우측) 묘소다.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 앞산 219번지에 있다.

*표지석 앞면: 昌寧 曺公 配位 先祖妣之墓(창녕 조공 배위 선조비지묘), *표지석 뒤면: 一七二八年 戊申義擧로 인해 諱字를 정확히 알 수 없는 先祖妣 墓所로 戊申義擧의 고귀한 精神을 깊이 새기며. 一九九六年 五月 八世孫 柄溶 雲溶 灒溶 歡溶 槿溶 等 謹竪(1728년 무신의거로 인해 휘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선조비 묘소로 무신의거의 고귀한 정신을 깊이 새기며. 1996년 5월 8세손 병용 운용 찬용 환용 근용 등 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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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좌 배위(의령남씨?, 우측)·조덕좌 배위(?, 좌측) 묘소다. 묘소 뒤에서 석가산 조성좌(曺聖佐)·정좌(鼎佐) 배위 밀양손씨·덕좌(德佐) 묘소를 바라보며 촬영했다. 좌측편에 합천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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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좌 배위(의령남씨?)·조덕좌 배위(?), 아래쪽 1기: 조희좌·또는 조순령·또는 조정임(?)! 묘소 총 3기가 있다.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 앞산 219번지다. 상석(좌측면): 戊申義擧의 意味를 새기며 一九九九年 四月 日 八世從孫 柄溶 等 謹竪(무신의거의 의미를 새기며 1999년 4월 일 8세종손 병용 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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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빨간점밀양박씨(密陽朴氏) 묘소 망주석이다. 조성좌 배위(의령남씨?)·조덕좌 배위(?), 조희좌·또는 조순령·또는 조정임(?) 묘소에서 좌측 40m에 아래 사진의 밀양박씨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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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경(曺範敬, 일명: 경원, 조성좌 손자)의 배(配)인 밀양박씨(密陽朴氏) 묘소에서 본 묘소 앞 풍경이다. 경남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 시조부(媤祖父, 조성좌公) 묘소 앞산 219번지 휘 성좌 배위·희좌(?) 등 묘소 좌측 40m 오좌(午坐)에 있다. 권빈 삼거리에서 석가산 앞-김봉으로 들어오는 구도로(신작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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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경(조성좌 손자) 배위인 밀양박씨(密陽朴氏) 묘소다. 휘 성좌 배위·희좌(?) 등 묘소에서 (절하는 방향 기준) 좌측 40m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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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경(조성좌 손자) 배위인 밀양박씨(密陽朴氏) 묘소다. 상석(좌측면): 子 有喆 孫 錫圭 曾孫 相淳 基淳 敏淳 完淳, 孫 錫一 曾孫 福淳 判淳, 孫 錫珠 曾孫 喜淳(자 유철 손 석규 증손 상순 기순 민순 완순, 손 석일 증손 복순 판순, 손 석주 증손 희순), 성좌 배위·희좌(?) 등 묘소에서 (절하는 방향 기준) 좌측 40m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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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경(조성좌 손자) 배위인 밀양박씨(密陽朴氏) 묘소다.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 앞산 219번지에 있다. 우측으로 40m 너머 조성좌 배위(의령남씨?)·조덕좌 배위(?) 등 묘소 3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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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전·하현(조성좌 조부 및 종조부), 조성좌·정좌(밀양손씨와 합분)·덕좌, 조성좌·덕좌배위(?), 조범경(조성좌 손자) 배위 밀양박씨 묘소 등 석가산 묘도(墓圖)다.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다. 좌측 위에 '봉서정과 도촌 별묘'가, 좌측 밑에는 수몰로 이전한 봉산면사무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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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좌 5대 선조인 조응인 대구도호부사 교지(75㎝×51㎝): 1618년(광해10) 만력46년 11월 9일 받은 임명장이다. 경남 합천군 삼가면 이부마을에 세거하고 있는 조성좌 선조의 종손(宗孫, 조상재)이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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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좌 5대 선조인 조응인 대구도호부사 교지(75㎝×51㎝): 1618년(광해10) 만력46년 11월 9일 받은 임명장이다. 경남 합천군 삼가면 이부마을에 세거하고 있는 조성좌 선조의 종손(宗孫, 조상재)이 소장하고 있다.

(1728년 무신혁명 대장군 휘 聖佐 8세손 曺濽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