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6대 조부모(성좌 아들·며느리) 묘소와 묘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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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竹先生 작성일26-02-28 15:17 조회7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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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면 이부길 6 우리집 벚꽃이 폈다.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권(卷)18 형률(刑律)-도적(盜賊)-모반대역(謀反大逆)' 규정에 따라 정배된 뒤, 1744년(영조20) 해배돼 정착한 원만마을에 있는 내 6대 조부모 인엽(仁燁)-달성서씨 및 6대 방조부모 신엽(信燁)-배위 묘소다. 인엽 및 신엽은 조성좌공 아들이다. 거창군 신원면 구사리(옛 삼가현 율원면 원만-元萬마을) 산 100번지(6,248㎡) 월여산 능선을 바라보고 있다. 휘 인엽(仁燁 일명: 만래) 증손인 석일(錫一, 일명: 봉수·奉守)이 1919년 4월 25일 소유권 보존등기했다. 인엽 아버지(성좌)·삼촌(덕좌)·아재(정좌) 묘소가 있는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 230-2번지는 18km 떨어져 있다. 일찍이 우리 고장 출생인 무학대사(無學大師, 朴自超, 1327~1404)가 여기 월여산 일대를 금계포란(金鷄抱卵) 형국으로 해동(海東) 제일의 길지라고 했다. 묘소 앞 월여산 건너편이 무학대사 출생지로 알려진 합천군 대병면 대지리이고, 5km 떨어진 곳에 거창 신원사건 희생자 추모공원이 있다.



▲내 6대 조부모 인엽(仁燁)-달성서씨 및 6대 방조부모 신엽(信燁)-배위 묘소다. 인엽 및 신엽은 조성좌공 아들이다. 거창군 신원면 구사리(옛 삼가현 율원면 원만-元萬마을) 산 100번지(6,248㎡) 월여산 능선을 바라보고 있다. 묘역 안에 봉문이 없는 밀장이 3~5기나 있다. 70여년 전 6대 조부모 봉분을 사토할 때 원만마을 묘지기인 김윤진씨 부친도 작업에 참여하여 도왔다.

▲나의 6대조인 휘 인엽(仁燁) 및 달성서씨(達城徐氏)묘소, 상석(좌측면): 子 敬源, 孫 有喆, 曾孫 錫圭 錫一 錫珠, 六代孫 柄溶 設溶 仁溶 九溶 浩溶 雲溶 灒溶 雨溶 明溶 外 後孫 一同 一九九四年 十一月 建立(자 경원, 손 유철, 증손 석규 석일 석주, 6대손 병용 설용 인용 구용 호용 운용 찬용 우용 명용 외 후손 일동 1994년 11월 건립)

▲상석(좌측면): 子 敬源, 孫 有喆, 曾孫 錫圭 錫一 錫珠, 六代孫 柄溶 設溶 仁溶 九溶 浩溶 雲溶 灒溶 雨溶 明溶 外 後孫 一同 一九九四年 十一月 建立(자 경원, 손 유철, 증손 석규 석일 석주, 6대손 병용 설용 인용 구용 호용 운용 찬용 우용 명용 외 후손 일동 1994년 11월 건립)

▲6대 종선조인 휘 신엽(信燁) 및 배위 묘소다.

▲상석(좌측면): 1999年 4月 日 五代(六世)孫 東喆 東進 謹竪(1999년 4월 일 5대(6세)손 동철 동진 근수)



▲앞에 월여산 능선이 보인다. 산을 넘으면 무학대사 출생지로 알려진 대병면 대지리다. 일찍이 우리 고장 삼가현 출생인 무학대사가 월여산 일대를 금계포란(金鷄抱卵) 형국으로 해동(海東) 제일의 길지(吉地)라고 했다.

▲휘 인엽(仁燁, 일명: 만래·萬來(乃))의 계배(繼配, 재취)인 초계정씨(草溪鄭氏) 묘소다. 정세유(鄭世儒, 1675∼1728, 부: 정중리, 조부: 정기윤) 손녀인 초계정씨(草溪鄭氏)는 무신혁명 정세유(鄭世儒, 54세)·정희량(鄭希亮, 약44세, 8촌형: 정세유) 가문인데, 정세윤 대고모부가 조하현(曺夏賢, 1633∼1676, 장인: 청하현감 정기윤, 손자: 조명좌)이다. 초계정씨(부: 정의장)는 1744년(영조20) 해배된 후 조인엽과 결혼했다. 정기윤 장인이 우의정 미수 허목이다. 위 초계정씨 묘소는 공(公, 조만래) 묘소 좌측 위쪽 30m에 자리하고 있다.
□조성좌의 맏아들인 조인엽의 아내(재취) 초계정씨(草溪鄭氏)가 정세유(鄭世儒, 1675~1728, 부: 정중리, 조부: 정기윤, 증조: 정창모, 대고모부: 조하현)의 손녀라는 이유가 다음과 같다.
◇위 초계정씨는 1744년(영조20) 해배된 후 결혼했는데, 그녀의 조부 정세유의 묘소가 합천군 봉산면 노곡리 353번지 앞산 600m 지점인 거창군 신원면 수원리 산 15번지에 있고, 정세유 아들 정의장(鄭宜璋, 딸: 초계정씨) 묘소가 조성좌·정좌·덕좌 묘소(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산 230-2번지)에서 1.4km 거리인 봉산면 행정리 산풍곡(山風谷)에 있는 것, 정세유 대고모부 조하현(曺夏賢, 1633~1676, 장인: 정창모)이 조명좌(曺命佐, 6촌형: 조성좌) 조부라는 것, 정세유 4촌동생 정관유(鄭觀儒, 1699~1728, 부: 鄭重恒. 1665~1728, 8촌형: 정희량)가 조성좌 매제라는 것과 거창군 신원면에도 '석가산의 쇠갓'이라는 전설이 내려온 것 등이 조인엽(일명: 조만래) 배위 초계정씨가 정의장(鄭宜璋, 1720?~1728, 일명: 정은서, 부: 정세유)의 딸이라는 이유다. 정세유 후손들(정철균 등)은 거창군 위천면에서 40km 떨어진 봉산면 노곡리 353번지로 이사와 세거하고 있다.

▲휘 인엽(仁燁, 일명: 만래·萬來(乃))의 또다른 배위인 초계정씨(草溪鄭氏) 묘소 상석이다. 초계정씨(草溪鄭氏)는 무신혁명 정세유(鄭世儒, 1675∼1728, 부: 정중리, 조부: 정기윤, 증조: 정창모, 대고모부: 조하현) 손녀(부: 정의장)다. 초계정씨는 1744년(영조20) 해배된 후 결혼했다. 정세유(고조: 동계 정온) 묘소도 거창군 신원면 수원리 산 15번지에 있는데, 위치가 합천군 봉산면 노곡리 353번지 앞산 600m 위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정세유 아들 정의장(鄭宜璋) 묘소는 조성좌·정좌·덕좌 묘소(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산 230-2번지) 인근 1.4km 거리인 봉산면 행정리 산풍곡(山風谷)에 있다. 정세유 후손들(정철균 등)은 거창군 위천면에서 40km 떨어진 봉산면 노곡리 353번지로 이사와 세거하고 있다.

▲초계정씨 상석(좌측면): 1999年 4月 七世孫 柄溶 雨溶 富溶 謹竪(1999년 4월 7세손 병용 우용 부용 근수)로 새겼다. 초계정씨(草溪鄭氏)는 거창 위천면 강천리의 무신혁명 정세유(鄭世儒) 손녀(부: 鄭宜璋) 손녀다. 이곳 원만마을에서 13km 떨러진 합천군 봉산면 노곡리 353번지에는 거창군 위천면에서 이거한 정세유 후손인 초계정씨(정철균 등)가 살고 있다. 참수된 정세유 묘소도 거창군 신원면 수원리 산 15번지에 있는데, 위치가 노곡리 353번지 앞산 600m 위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정세유 아들 정의장(鄭宜璋) 묘소는 조성좌·정좌·덕좌 묘소(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산 230-2번지)에서 1.4km 떨어진 봉산면 행정리 산풍곡(山風谷)에 있다.
<비문>
나의 6代祖考(6대조고)의 諱(휘)는 仁燁(인엽, 아명: 萬來(乃))이고, 姓(성)은 曺氏(조씨), 本貫(본관)은 昌寧(창녕)이며, 配位(배위)는 달성徐氏(서씨) 및 초계鄭氏(정씨)이다. 휘 인엽의 6대조고는 대구부사 陶村(도촌) 휘 應仁(응인)이고, 5대조고는 정주목사 梧溪(오계) 휘 挺立(정립)이며, 高祖考(고조고)는 양산군수 雪洲(설주) 휘 時亮(시량)이다.
또한 우리 문중은 朴彭年(박팽년) 河潤(하윤) 李彦迪(이언적) 元俊良(원준량) 申季誠(신계성) 양희(梁喜) 盧禛(노진) 李賢輔(이현보) 李山海(이산해) 金宇顒(김우옹) 裵興立(배흥립) 柳雲龍(유운룡) 柳成龍(유성룡) 丁若鏞(정약용) 朴廷璠(박정번) 李大期(이대기) 趙挺(조정) 文弘道(문홍도) 趙靖(조정) 趙翊(조익) 權瀁(권양) 한준겸(韓俊謙) 尹銑(윤선) 李埈(이준) 申渫(신설) 柳穡(유색) 河憕(하증) 柳希奮(유휘분) 鄭文孚(정문부) 許洪材(허홍재) 李彦英(이언영) 鄭蘊(정온) 李潤雨(이윤우) 李溟(이명) 金德民(김덕민) 權濤(권도) 李尙馨(이상형) 李之英(이지영) 李之華(이지화) 韓夢參(한몽삼) 李應蓍(이응시) 趙壽益(조수익) 慶昌君(경창군) 洪宇遠(홍우원) 呂孝曾(여효증) 宋挺濂(송정렴) 崔鎭南(최진남) 李瀷(이익) 鄭維岳(정유악) 申厚命(신후명) 宋奎昌(송규창) 등의 문중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北人(북인, 후에 남인)의 명문세가였다.
그러나 휘 인엽의 아버지이신 大將軍(대장군) 휘 聖佐(성좌)께서 南冥(남명)과 來庵(내암)의 敬義思想(경의사상)을 실천하고 소외계층을 위한 변혁과 지역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1728년 3월에 거사한 戊申革命(무신혁명, 소위 정희량란)이 실패한 후, 동생인 휘 信燁(신엽, 배위는 달성서씨)과 함께 가족들이 묘산 도옥에서 강원도 인제 등지로 유배됐으나, 공노비 제도의 문란과 慶昌君 李珘(경창군 이주, 후손) 李宗城(이종성) 吳命瑞(오명서) 曺漢儒(조한유) 등의 도움으로 오지인 여기 원만마을에 피신하게 되었다. 그 후 가회 도탄, 쌍백 안구를 거쳐 삼가 이부마을 및 강성마을에 정착하였다.
우리 후손들은 함경도에서 경상도까지 경향각지에서 봉기한 무신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家統(가통)을 잊지 않고 계승하여 지역사회와 나라발전에 기여하는 자랑스런 후손들이 되었으면 한다.
서기 2005년 4월 휘 인엽 7세손 灒溶(찬용) 謹撰(근찬)
휘 인엽 7세손 柄溶(병용) 雨溶(우용), 휘 신엽 7세손 勇昊(용호) 謹竪(근수)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성호전집 권53 등과기(登科記)에서 “(1728년 영조 4년 3월) 무신변란(戊申變亂) 후에 명문거족, 이름난 사람, 유명한 선비, 고관대작, 지위가 미천한 사람을 불문하고 모두가 형벌(刑罰)을 당해 죽었고, 수년 동안 기상이 꺾여 무너진 것이 파멸적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된 것과 진배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블로그 '내 5대조 및 배위 묘소와 비문' 참조: https://blog.naver.com/antlsguraud/221162050675

▲저 뒷편에 휘 인엽 및 신엽과 배위 묘소가 보인다. 앞 묘소들은 포산곽씨들 묘소다. 좌측을 돌아 30m 위에 초계정씨 묘소가 있다. 포산곽씨는 1728년 3월 21일 조성좌 거병 때 가담하여 참수된 곽세신(郭世臣)의 후손 또는 방손인 듯하다.

남명 조식이 1549년(명종4) 8월 제자인 함양의 임희무(林希茂)·박승원 등과 목욕하며 한시(漢詩) '욕천(浴川)'을 지은 가마소를 지나 1km 올라가면 위 묘소가 나온다. 당시 가마소는 삼가현 율원면 끝자락이었다. 1914년 3월 1일 일제가 거창군으로 편입했다. 무학대사가 이 곳 월여산 일대를 해동 제일 길지라고 했다.

▲휘 인엽의계배(繼配, 재취)인 초계정씨 묘소다. 초계정씨(草溪鄭氏)는 무신혁명 정세유(鄭世儒, 54세)·정희량(鄭希亮, 약44세)가문이다. 1744년(영조20) 해배된 후 결혼했다. 참수된 정세유 묘소도 거창군 신원면 수원리 산 15번지에 있고, 후손들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서 이사와 인근 합천군 봉산면 노곡리 353번지에 살고 있다. 정세유 아들 정의장(鄭宜璋, 사위: 조인엽) 묘소는 조성좌·정좌·덕좌 묘소(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산 230-2번지) 인근 1.4kn 떨어진 봉산면 행정리 산풍곡(山風谷)에 있다.

▲초계정씨 묘소에서 바로본 앞 풍경이다. 무학대사가 동방 제일의 길지(吉地)라고 한 월여산이 보인다.

▲원평(原坪)마을 주차장에서 700m 쯤 위로 올라와 우측을 바라본 전경이다. 가운데빨간 점은 조만래(曺萬來, 인엽·仁燁)와 동생 조신엽(曺信燁)-배위 묘소다. 가운데 좌측 빨간 점은 휘 만래 또다른 배위인 초계정씨(草溪鄭氏) 묘소다. 거창군 신원면 구사리 100번지다.

▲옛 원만(元萬)마을 입구 느티나무다. 앞 대나무가 있는 곳에 옛 원만마을이 있었다.

▲옛 원만(元萬)마을 집터다. 1740년대 중-말엽에는 조만래(조인엽)-조신엽 등 10가구 미만이 살았을 것이다. 100년 가까이 조만래(조인엽)-조신엽 등 묘소 벌초를 해 주고 있는 묘지기 김윤진씨 윗대 선조도 원만마을에 살았다. 이곳에서 아버지 조성좌 묘소까지는 18km다. 고향 집인 합천 묘산면 도옥리 293번지는 25km 거리다. 이곳 원만에서 조만래 아들 조범경이이주한 삼가현 가회면 도탄리 구송정마을은 25km 거리고, 구송정에서 조범수 아들 조유철이 이주한 삼가현 양전리 안구마을 762번지(垈 195m²)는 18km다. 이곳에서 조유철 손자(宗孫) 조상순이 5km 거리인 삼가현 일부리 856번지 대밭 밑으로 이주했다.

▲이곳 원만에서 조만래 아들 조범경이 배위 밀양박씨가 별세한 뒤 이주한 삼가현 가회면 구송정마을은 25km 거리고, 구송정에서 조범수 아들 조유철이 이주한 삼가현 양전리 안구마을은 18km다. 안구(쌍백면 평구리 762번지)에서 조유철 아들 조석규 및 손자 조상순(내 조부)이 5km 거리인 삼가현 일부리856번지(대밭 밑)으로 이주했다.

▲감나무와 담장이 보인다. 옛 원만(元萬)마을이다. 오지 중 오지인 월여산(月如山, 863.4m) 밑이다. 1728년(영조4) 무신혁명 합천 주동자 조성좌(曺聖佐, 1696~1728.4.1)의 아들 조만래(曺萬來, 인엽·仁燁)와 동생 조신엽(曺信燁), 그의 아들 조범수(曺範守)-범경(曺範敬)이 7,80년 정도 살았던 곳이다.

▲1728년(영조4)무신혁명 대장군 휘 성좌(聖佐) 아들인 인엽-신엽이 1744년(영조20) 경부터 살았던 옛 원만(元萬)마을 집터다. 오지 중 오지인 월여산(月如山, 863.4m) 밑이다. '만래(萬來, 인엽)가 우두머리로 살고 있는 동네'라고 해서 '원만(元萬)마을'이라고 불렀다. 원만 산골마을은 포산곽씨, 김녕김씨 등 가구수가 20호 남짓됐는데, 산 끝머리에 있었다. 1974년 새마을운동으로 1km 밑에 원평(原坪)마을을 만들어서 모두 옮겨가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원만마을이 산(山) 끝자락 오지(奧地) 중 오지였기 때문이다. 위 포산곽씨는 1728년 3월 21일 조성좌 거병 때 가담하여 참수된 곽세신(郭世臣)의 후손 또는 방손인 듯하다.


▲월여산 정상까지 2.1km 남았다는 이정표다. 사진 좌측에 옛 원만(元萬)마을이 있었다. 이 산골에 포산곽씨, 김녕김씨 등 20호 남짓 살았다. 1700년대 중-말엽에는 조만래(조인엽)-조신엽 등 10가구 미만이 살았을 것이다.

▲옛 원만(元萬)마을에서 내려오면서 산 아래 원평마을 쪽으로 바라본 풍경이다.

▲1914년 3월 1일까지 500년 동안 삼가현(三嘉縣) 지역이었던 거창군 신원면 구사리(옛 원만마을) 산 100번지(6,248㎡)는 휘 인엽-신엽 및 배위 묘소다. 휘 인엽 증손인 석일(錫一, 일명: 봉수·奉守)이 1919년 4월 25일 소유권 보존등기했다. 옛 원만에서 조성좌(曺聖佐)공 고향 집인 합천군 묘산면 도옥리 293번지는 25km 거리다.

“충청도 문의현 관노비 조완벽(趙完璧)은 자신을 관차(官差, 관에서 파견 관리)라고 가칭하고 진개남(陳介男)에게 환곡 납입을 독촉했는데, 납부하지 않자 발로 차고 때려서 3일 만에 죽게 한 죄인이다. 관노비[官隸]들은 촌맹(村氓, 시골 백성)들에 대해 하나라도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능멸하고 침해하는 것이 예사이고, 능멸과 침해를 당한 자들은 비록 집이 파손되고 몸에 상처를 입더라도 요행히 죽지만 않으면 머리를 숙이고 분노를 참으면서 감히 한마디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것 또한 일상적인 일이다. 저 진개남(陳介男)은 불행히도 죽었기 때문에 부득이 관아에 알려졌는데, 상처가 낭자하고 사증(査證)이 분명하여 면임(面任)이나 동료 하례(下隷, 하인)들로서도 검험할 때에 죄상을 숨겨 주지 못했다. 이러한 무리에게 만약 법에 따라 목숨으로 죗값을 치르게 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죽은 자의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을 것이며, 다른 하례들의 완악함을 크게 징계할 수 있겠는가. 계속 추문하게 하라.” (일성록 정조 22년 1798년 5월 22일)
(1728년 무신혁명 대장군 휘 聖佐 8세손 曺濽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