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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태복경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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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목사 오계 조정립 행장과 무신혁명, 좌의정 이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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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竹先生 작성일25-08-19 18:02 조회3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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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목사 오계조정립(梧溪 曺挺立, 1583~1660)무신혁명(이인좌의 난) 조성좌(曺聖佐)의 고조부다. 일제시대인 1913년 창녕군 고암면 원촌리 출생인 심재 조긍섭(深齋 曺兢燮, 1873~1933)이 오계 행장을 지었다. 

[거창 가북면 중촌(다전마을) 출생인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1846~1919.8)은 1913년 조정립 묘지(墓誌)를 지었다]

1913년에도, 1728년(영조4) 3월 무신혁명(戊申革命)<1> 후유증으로 합천 창녕 조문(曺門)은 한미했다. 이를 조금이나마 벗어나려고 오계 조정립 후손인 조계달(曺啓達, 1861~1918, 조시적·曺時迪 7세손)과 조석형(曺錫衡, 1867~1917, 조시건 9세손, 조명현·曺明顯 현손)이 요청하여 조긍섭(41세)이 행장을 지었다. 1913년 당시 오계 조정립 계배 후손인 조시적(曺時迪)·시매(時邁)·시건(時建)과 시열(時說)·시방(時䢍) 후손들이 고향 봉산면 김봉 및 압실에 살고 있었다.

이들 5명의 후손들은 1934년 합천군 묘산면 안성리에서 최초 출간한 창녕조씨족보(갑술보)에는 이름 자체가 없다. 갑술보는 합천군 묘산면 거주 창녕조씨들 주관으로 만든 최초의 족보이고(조정생 11세손인 조학승이 서문을 씀), 이 때 이른바 역적인 조덕좌(曺德佐, 조성좌 동생, 조시량 증손) 후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입적되고, 묘산면 평촌의 이른바 역적 조명좌(曺命佐, 조시량 증손) 후손도 등재되고, 조정생(曺挺生, 조정립 동생) 막내아들(4남)로 조시무(曺時武)라는 인물도 등재가 됐는데, 조시적·시매·시건과 시열·시방 후손들이 모두 족보(갑술보)에 빠진 게 의아(疑訝)스럽다.

1728년 무신혁명으로 합천 상주 문경 파주 '창녕조씨 송군(松君)' 후손들은 아수라가 돼, 선대 묘소도 일부 실전됐고, 1934년 5월에야 족보다운 창녕조씨족보(송군파보)를 만들었다. 심지어 1960년 또는 1980년까지 일부 묘소는 관리(성묘)조차 전혀 하지 못했다. 고택(조실구·조응인·조우인 등)은 죄다 없어졌으며, 정배된 많은 조씨(曺氏)들은 무소식이 됐고, 서적(고서)은 약탈 당했고, 족보도 흐릿하게 됐다.

이런 혼미한 상황에서, 특히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에서 한문에 능한 조을환(曺乙換, 75세, 13촌 조카인 조상(曺塽)의 봉강문집(鳳岡文集)도 1967년 주간해서 간행)이 일면식도 없는 합천군 삼가면 이부동 조성좌 후손들을 찾아가서 이른바 '창녕조씨양산공파보(1969년 4월 간행)'를 왜곡·날조하여 만드는 등 떼거리로 투탁 대열에 앞장선 후 모습을 감췄다.

오계조정립 둘째 아들이며 조시량(曺時亮, 양산군수)의 동생인 조시윤(曺時胤)은, 화성시 매송면의 조송무(曺松茂, 고려 중기) 현손인→조익청(曺益淸)→조익청 손자 단고 조상치(丹皐 曺尙治, 부제학, 영천 입향조)→조상치 증손 창산군 조계은(昌山君 曺繼殷, 종부시정, 정국공신 4등)→으로 이어진 조난서(曺鸞瑞, 1568~1634, 부: 曺世俊, 증조: 조계은,1623년 4월 합천군수)에게로 출계했다.

조시윤(曺時胤, 생부: 조정립, 양부: 조난서) 아들인 조하경(曺夏卿, 1635~1710, 순천부사·첨지중추부사)의 사위는 감역(종9품) 이부명(李孚命)인데, 이부명은 노론의 거두인 좌의정 소재 이이명(疎齋 李頤命, 1658~1722)의 형님이다. 조하경 손위 동서는 승무원 정자 유명전(柳命全, 정정옹주·貞正翁主의 양자, 안산 출생)이다.

이런 이유로 조시량(曺時亮, 양산군수, 무신혁명 조성좌 증조부)의 동생 및 조카인 조시윤 조하경·하형 후손들이 1728년(영조4) 무신혁명(이인좌의 난)에 불참한 듯하다.

1913년 심재 조긍섭이 지은 아래 오계(梧溪)공 행장에는, 조시윤은 아들 둘을 뒀는데 부사 조하경(曺夏卿)과 진사 조하형(曺夏亨)이다.

다만, 임자식년 문무과 방목에는 서제(庶弟)로 조하성(曺夏成)이 있다. 조하성 외증조는 화순 출생인 양우전(梁禹甸, 1595~1672)이고, 외조부는 양지해(梁之瀣)인 것 같다. 아마도 조하경(65세)이 순천부사 재직 때인 1699년(숙종25)에 양지해 삼녀를 재취(再娶)한 듯하다.

조시윤, 조하경 후손들은 안양 석수동 등지에 많이 세거하고 있다.

*주: <1>1728년(영조4) 3월무신년 봉기이인좌 정희량 이유익 조성좌 등 주체세력들이 동학혁명(1894년)처럼, 지방의 수령·병사(兵使) 등을 임명하고, ‘제역감역(除役減役)·불살읍쉬(不殺邑倅)·불살일민(不殺一民)·불탈민재(不奪民財)·물겁부인(勿怯婦人)·환곡호궤군병(還穀犒饋軍兵)’ 실천 강령을 채택하여 시행했기 때문에 ‘무신혁명(戊申革命)’이라고 명명했다. 이른바 무신란(戊申亂, 이인좌의 난)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무려 1천여 번이나 나온다.

또한 무신역옥추안(戊申逆獄推案, 국사편찬위원회, 1994년 발간)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1728년(영조4) 일어난 무신년 변란은 조선후기 정치·사회체제의 구조적 한계와 모순으로 인해 일어난 의리명분 논쟁의 한 양상이면서 동시에 대규모적인 권력투쟁의 표출이기도 했다. 분출된 각 계층의 저항 세력이 왕조 교체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지속적으로 정권 교체를 지향했다. 아무튼 무신란(戊申亂)은 소외계층의 변혁운동이었다."

□ 통훈대부 행 정주목사 오계 조공 행장 계축(通訓大夫行定州牧使梧溪曺公行狀 癸丑): 1913년 암서 조긍섭(巖棲 曺兢燮, 1873~1933) 지음.

공의 휘는 정립(挺立)이고 자는 이정(以正)이다.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선계가 신라 태사(太師) 휘 계룡(繼龍)에서 나왔다. 고려 태조 때 휘 겸(謙)은 벼슬이 대악승(大樂丞)이었고,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다. 그 뒤에 평장사(平章事)가 된 분이 여덟이었고, 후손들이 계속 벼슬이 혁혁하였다. 휘 계형(繼衡)에 이르러 연산군과 중종의 즈음에 당하여 벼슬이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 이 분이 휘 언홍(彥弘)을 낳았으니 부사과(副司果)를 지냈고, 이 분이 휘 몽길(夢吉)을 낳았으니 목사(牧使, 주: 상주목사 역임하지 않음. 1913년 이때부터 왜곡함-조긍섭 찬 행장, 곽종석 찬 묘지에도 '상주목사' 역임으로 왜곡함)을 지냈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휘 응인(應仁)을 낳았으니 유림의 명망이 있었고 벼슬은 대구 부사(大丘府使)를 지냈으며, 호는 도촌(陶村)이다. 부사공은 전의 이씨(全義李氏, 주: 설학 이대기 여동생) 군자감정 증 승지(軍資監正贈承旨) 득분(得蕡)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만력(萬曆) 계미년(1583) 8월 8일에 합천(陜川)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7, 8세 때부터 기국과 도량이 이미 이루어졌다. 겨우 관례를 하였을 무렵에 종숙부 이재(頤齋) 선생 우인(友仁)에게 수업하여 경사(經史)를 섭렵하여 문예(文藝)가 고원하고 통달하였고 시에 더욱 뛰어났다. 약관(弱冠)의 나이 때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고, 을사년(1605, 선조38)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기유년(1609, 광해군1) 증광시에 등과하여 명성이 크게 드러나 처음에는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 제수되었다. 이로부터 청요직을 역임하여 양사(兩司)에 있을 때는 정언(正言)·지평(持平)·헌납(獻納)·장령(掌令)을 역임하였고, 춘방(春坊, 주: 세자시강원)에 있을 때는 설서(說書)·사서(司書)·문학(文學)·필선(弼善)을 역임하였으며, 관직(館職)에 있을 때는 수찬(修撰)·교리(校理)·겸지제교(兼知製敎)를 역임하였는데, 있는 곳마다 모두 직분에 들어맞았다. 그러나 계축년(1613, 광해군5)이후부터 조정의 의론이 서로 갈라지고 국시(國是)가 어그러지고 뒤섞여 식견 있는 사대부들 중 사당(邪黨, 주: 정인홍)에 들어 이상한 의론을 주장하는 이가 많았으나 공과 부사(府使, 주: 창원부사)였던 아우 정생(挺生)은 오직 바른 사람에게 의귀하였다.

정사년(1617, 광해군9) 겨울에 흉측한 의론이 일어나 대비(大妃)를 유폐시키려고 도모하자, 공은 헌납(獻納)이 되어 사간(司諫) 남이준(南以俊)과 지평(持平) 김호(金昈)·정양윤(鄭良胤)과 함께 일시에 상소하였는데, 광해군이 매우 노하여 불충으로 논하고 모두 외직에 임명하라고 명하여 공은 나가 북청 판관(北靑判官)이 되었다. 무오년(1618, 광해군10) 가을에 북청에서의 치적이 뛰어난 것으로 서북의 문관 수령(文官守令)을 맡게 되었다. 광해군은 여전히 이전의 노여움을 품어 네 사람을 모두 남쪽 지방으로 옮겨 임명하였는데, 공은 영해 현령(盈海縣令)이 되었다. 부사공(府使公)이 당시 대구부(大丘府)를 맡고 있었는데, 위적(僞賊)을 잡지 못한 일이 있었다. 처음에 부사공은 야정(倻鄭, 주: 정인홍)과 같은 고을에 살았는데, 일찍이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뒤에 그가 이첨(爾瞻, 주: 이이첨)에게 매수된 것을 보고 바로 투서하기를, “근래 광창(廣昌)이 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소인입니다. 또 어찌 몸이 산림에 있으면서 권신과 결탁하여 능히 끝까지 좋은 이름을 보존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빨리 그와 절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정(鄭, 주: 정인홍)의 자질(子姪)들이 그 편지를 이첨에게 보여 주었는데, 이첨은 실로 이미 앙심을 품게 되었다. 기미년(1619, 광해군11)에 역조(逆造)가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이첨의 뜻에 영합하여 비위를 맞추려고 하였다. 마침 위적(僞賊) 박치의(朴致毅)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혹자가 “치의가 대구의 팔공산에 숨었다.”라고 하였다. 그것으로 인하여 일부러 치의를 놓아주었다고 무함하여 부사공을 옥에 갇히도록 하였는데, 반 년 만에 풀려났다. 정(鄭, 주: 정인홍)의 자질들이 다시 편지로 이첨을 부추겨 말하기를, “반드시 조모(曺某) 부자(父子)를 제거한 뒤에야 영남 선비들의 의론을 한데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부사공은 이로부터 배척당하여 등용되지 못하였고, 공은 영덕(盈德)에 6년이나 있으면서도 소환되지 않았으니, 대개 간당(姦黨)들이 조정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이었다. 계해년(1623, 광해15)에 반정(反正)하고서야 체직되어 돌아왔다.

갑자년(1624, 인조2)에 부사(주: 조응인)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이로부터 10여 년을 집에서 지냈다. 병자년(1636, 인조14) 겨울에 북쪽 오랑캐가 도성에 쳐들어오자 공은 난리를 듣고 왕사에 근로하였다. 다음해 봄에 도성에 이르러 비로소 공조 좌랑(工曹佐郞, 주: 조정융 찬 묘갈명에는 공조정랑, 김봉·압실 曺씨들이 왜 '공조정랑' 몰랐을까)에 임명되고 이어서 평양 서윤(平壤庶尹)에 제수되었다. 평양 고을은 오랑캐에게 처음으로 병화를 겪어 공사 간이 텅 비게 되었는데, 공은 수고로움을 다하여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하니, 일 년이 되지 않아 옛날처럼 안정되고 창고에도 쌓인 것이 있게 되었다. 당시에 서로(西路)에 일이 많아 공문이 번잡하였는데, 순찰사가 번거롭고 처리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맡기니, 공은 판단하여 처리하는 것이 모두 이치에 합당하였다. 평양부에 한 명의 사형수가 있어 이미 무복(誣服)하여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공은 그가 원통하다고 의심하여 집행을 늦추었다가 마침내 실제 범인을 찾아내어 무고가 밝혀지니, 방백(方伯) 이하들이 모두 신통하게 여겼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신들이 왕래하며 명성에 대하여 서로 말하였다. 5년의 임기가 다 되어 내직으로 들어와 군자감 정(軍資監正)이 되었다. 이윽고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나갔는데, 당시에 조정에서는 품계를 올려 중용하려고 하여 비변사(備邊司)에서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의망하였으나 명이 내려오기 전에 곧 체직되어 돌아왔다.

을유년(1645, 인조23)에 담양 부사(潭陽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에 군기시 정(軍器寺正)에 제수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나가게 되어 길이 평양을 경유하였는데, 온 경내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다투어 맞이하고 전송하여 수 백 리에 공장(供帳)이 이어졌다. 정주에 있을 때 한결같이 평양을 다스릴 때와 같이 하여 지방관에 대한 평가가 일대에서 최고였다. 임기가 끝났으나 그대로 일 년을 더 머물렀는데, 두 고을 사람들이 모두 비석을 세워 기념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27)에 통례(通禮)로써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의 반대로)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며 금봉(金鳳)의 시냇가에 별장(주: 봉서정, 실제 1644년 인조 22년 12월 17일 건립함)을 정하였으니 연하(煙霞: 경치)와 천석(泉石: 경치)이 있는 승경(勝景: 뛰어난 경치)였다. 좋은 봄날이나 맑은 가을날이면 은자(隱者)의 차림으로 시냇물을 따라 오르내렸다. 때로 흥이 이르면 여러 명사들과 약속하여 경내의 여러 승지를 찾아 도착하여서는 편안하게 시를 읊조리니, 산 속 스님이나 시골 촌로들은 그가 벼슬하였던 사람인 줄 몰랐다.

공은 어려서 질병이 많았는데 섭양(攝養)에 방도가 있어 만년에 건강을 회복하였다. 연세가 80에 가까웠는데도 총명함이 여전하였고, 밤 늦게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종일 단정히 앉았으니 남들은 권태로운 기색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병이 위독했을 때도 정신이 또렷하여 자제들에게 뒷일을 부탁하는 것이 한결같이 평소와 같았다. 돌아가신 것은 실제로 현종(顯宗) 원년 경자년(1660) 9월 17일이었으니, 향년 78세였다. 그해 12월 3일 거창(居昌)의 견암산(見巖山) 자좌(子坐) 등성에 장사 지냈다.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현감을 지낸 양(瀁)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매우 있었고, 공보다 33년 앞서 돌아가셨다.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로는 장남 시량(時亮)은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고, 차남 시윤(時胤)은 양자(주: 합천군수 조난서 후사)로 나갔다. 딸로는 장녀는 수사(水使, 주: 정3품 전라좌수사) 이민발(李敏發, 주: 1599~1670, 형조판서 이명 아들, 묘소: 양주군 아차산 관곡)에게 출가하였다(주: 이민발 아내인 창녕조씨는 1600생~1663졸, 묘소: 조부 조응인 묘소 인근, 창녕조씨-이민발 사이에 자식이 없음). 다음은 사인(士人) 이전(李瑑, 주: 1607~1668, 하빈현 기곡마을 호조좌랑 이지영 아들)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사인 김시(金蓍, 주: 1619~1658, 증조부가 남원 산동면 출생 군수 김익복)에게 출가하였다. (21살 어린) 계배(繼配)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참판에 증직된 덕민(德民)의 따님으로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주부(主簿) 시적(時迪)·주부 시매(時邁)·통덕랑(通德郞) 시건(時建)이고, 딸은 이민행(李敏行)과 조두우(趙斗佑)에게 출가하였다. 후배(后配, 삼취)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아들 둘을 낳았는데, 시열(時說)시방(時䢍)이다.

(첫째 아내 권씨 사이에 태어난) 시량(時亮)의 두 아들은 하전(夏全)하현(夏賢)이고, 여섯 딸은 하준(河濬, 주:1623~1666, 하준·河浚의 오기, 진양하씨 운문파, 상주 출생, 자형: 장령 유천지)·이탁(李桌, 주: '이설·李卨+木'의 오기, 1622년생, 효령대군 9세손, 강성도정 이견손 6세손, 묘소: 봉산 봉계리 거안김동필(金東弼, 주: 조부가 보은읍 종곡마을 김덕민<조정립 둘째 장인>)·이성호(李聖虎, 주: 1632~1682, 임실 오수면 둔덕 출생 천묵재 이상형 손자)·여용화(呂用和,주: 1634~1710, 부친: 성주 벽진의 선산부사 여효증, 여효증 묘갈명을 만구 이종기 지음, 고모부: 대사간 박이장 손자 박원영<朴元榮, 아들: 朴世胄·聖胄, 맏며느리: 조정융(曺挺融, 사위: 朴世胄)의 딸, 둘째며느리: 조하양(曺夏良, 사위: 朴聖胄)의 딸>)·조태윤(趙泰胤, 주: 1642~1707, 상주 낙동면의 장령 조익·趙翊 증손)에게 출가하였다. 시윤(時胤,주: 묘소는 안양시 석수동)의 두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고 부사를 지낸 하경(夏卿,주: 사돈은 참판 이민적)과 진사를 지낸 하형(夏亨, 주: 처조부 원주시 호저면 최기벽)이고, (시윤) 한 딸은 이상일(李相一)에게 출가하였다. (1624년 보은읍에 귀양 중에 결혼한 21세나 어린 둘째 아내 김씨 사이에 태어난) 시적(時迪)의 세 아들은 무과에 합격한 하명(夏明)과 하징(夏徵)·하빈(夏彬)이다. 시매(時邁)의 한 아들은 하진(夏振)이다. 시건(時建)의 세 아들은 하영(夏英)·하근(夏根)·하귀(夏龜)이다. (삼취 파평윤씨 두 아들인) 시열(時說) 두 아들 하서(夏瑞)·하성(夏聖)이고, 시방(時䢍)의 한 아들은 하식(夏植)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할 수 없다.

*주: 위 시적(時迪)·시매(時邁)·시건(時建)시열(時說)·시방(時䢍)은 1934년 합천군 묘산면 안성리에서 출간한 창녕조씨족보(갑술보)에는 이름이 없다. 갑술보는 합천군 묘산면·봉산면 거주 창녕조씨들이 328년이 지나 만든 최초의 족보(조정생 11세손인 67세 조학승·曺學承이 서문을 씀)다.

이 때 이른바 역적인 조덕좌(曺德佐, 조시량 증손) 후손이라고 하는 사람(묘산 도옥리 서재골 거주)도 입적 및 등재(상권 31P)되고, 묘산면 평촌리 조명좌(曺命佐, 조시량 증손) 후손도 등재(상권 32P)되고, 조정생(曺挺生, 조정립 동생) 막내아들(4남)로 조시무(曺時武)라는 인물도 등재(상권 30P)됐는데, 조시적(曺時迪)·시매(時邁)·시건(時建)시열(時說)·시방(時䢍) 후손들은 등재가 안 됐다. 1960년, 90년 창녕조씨송군 및 태복경공파보에는 등재돼 있다. 그 이유가 뭘까.

특히 조시건(曺時建, 1635~1717) 현손서(玄孫壻)가 전의이씨 이병후(李秉厚, 1769~1839, 조한태·曺漢泰 사위)인데, 이병후 고조인 이지국(李之菊)은 참의 이지화(李之華) 사촌동생이다. 폐고가 된 합천 조성좌(曺聖佐) 문중과 고령 다산면 상곡 전의이씨(全義李氏) 가문과 결혼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다포 이지화(茶圃 李之華) 증손인 이익필(李益馝, 1674~1751)은, 1728년(영조4) 3월 무신혁명(이인좌의 난) 때 금위영 천총으로 재직하다 병조판서 오명항 휘하에서 별효위 별장(別驍衛別將)으로 차출돼 안성 및 죽산 전투에 공을 세워 15명 분무공신(奮武功臣) 중 3등에 책록되고, 전양군(全陽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이러한데도 무신혁명 후 60년 쯤 지나 합천 묘산-봉산 창녕조씨 도촌 조응인(陶村曺應仁, 대구도호부사) 가문과 결혼한 것은, 윗대에 도촌 손자 및 증손인 조시원(曺時遠)-조하강·하상(曺夏剛·夏相) 등이 전의이씨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은 인연도 작용했겠지만, 1744년(영조20) 영조가 정배죄인들을 양인(良人, 평민)으로 감형하여 방면했기 때문이다. 무신혁명으로 안음 정희량(鄭希亮) 및 문경 조세추(曺世樞) 가문처럼 완전히 파산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무신혁명(戊申革命, 조성좌의 난)이 발발하고 16년 뒤 1744년(영조20) 영조의 명(命)에 따라 호조참판 이양당 조탁(二養堂 曺倬)→이천부사 조명욱(曺明勗)→한성판관 조실구(曺實久)→조하장·하주(曺夏長·夏疇) 밑에, 그 후손으로 조명우(曺命佑, 1694~1758)를 입적시킨다. 조명우는 조하규(曺夏規, 1667~1709, 조실구 동생인 조실원 차남)의 아들이다. 조탁, 조명욱, 조실구, 조하장 후손으로 조명우를 입적했는데, 조명우 현손대(玄孫代)에 절손(絶孫)돼 몰락했다.

조명우 입적은 조몽정 둘째 아들인 형조정랑 조척(曺倜, 조탁 동생, 파주시 교하읍에 후손들 세거)의 증손인 조하격(曺夏格, 1693년생)과 조탁(曺倬) 사위인 유윤창(柳允昌, 1583~1647, 교하 출생, 마진군수)-창녕조씨(昌寧曺氏, 1583~1636.4)의 현손 유복명(柳復明, 1685~1760, 동지중추부사·형조판서)과 조명욱 사위인 경창군 후손, 그리고 조명욱 외증손인 유학 정진주(鄭鎭周, 1676~?, 이천 출생) 등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조등, 조탁, 조명욱, 조실구, 조하장, 조하주 등의 묘소는 전혀 돌보지 않아 황폐하게 돼 석물은 죄다 뽑히고 비석은 없어졌다. 조탁, 조명욱, 조실구 묘소는 버려졌다. 조명우(曺命佑, 아들: 曺允升·允斗) 현손(玄孫)대에 절손됐기 때문이다.

공(公, 주: 조정립)은 천성이 순수하고 어질며, 기국이 넓고 중후하였다. 마음가짐은 충성스럽고 두터워 남과 경계를 두지 않았고, 몸가짐은 겸손하고 삼가 하여 스스로 모나게 행동하지 않았다. 행동거지는 반드시 주도면밀하고 자세하였으며, 말씨는 편안하고 고요하였다. 일을 도모함에는 반드시 그 끝을 궁구하였고, 말을 할 때는 반드시 그 행실을 돌아보았다. 부모를 섬김에는 기뻐하는 안색과 부드러운 용모로 부모님께서 기뻐하시도록 힘써 곁에서 종일 모심에 게으른 기색이나 거만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형제간에 있어서는 애정이 돈독하고 지극하여 많은 것을 나누고 적은 것을 보태어 줄 때 이해를 따지지 않았다. 더욱이 조상을 섬기는데 삼가하여 제수를 마련할 때 반드시 친히 주관하여 정결하게 하였고, 새로운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사당에 올렸다. 속절(俗節)에는 반드시 묘소에 가서 배알하였는데, 팔순의 나이에 가까워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향사에는 질병이 아니면 반드시 몸소 제사를 받들었다. 종족을 대할 때는 친인척 간에 차별을 두지 않았고, 여러 아랫사람을 부릴 때는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풀었으며, 종들에게까지도 모두 환심을 얻었다. 벗을 사귈 때는 반드시 함께 할 사람을 가리되 사생(死生)과 궁달(窮達) 때문에 조금도 변하는 것이 있지 않았다. 숙특(淑慝: 선행과 악행)과 향배(向背)의 사이에서는 비록 목소리와 안색을 크게 엄하게 한 적은 없었으나 정신이 통하고 기상이 합하는 사람은 모두 한 때의 선인(善人)과 군자(君子)들이었다.

북청 판관(北靑判官)으로 나갔을 때, 백사(白沙) 이 상공(李相公, 이항복)이 의론을 올린 것 때문에 이 고을에 귀양 와 있었는데, 한 번 만나보고는 평소에 알고 있었던 것처럼 기뻐하였고, 그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만사를 지어 애도하였는데, 대부분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 서 판서(徐判書) 성(渻)·김 판서(金判書) 시양(時讓, 주: 현손 김덕유·덕조는 1728년 무신변란에 참여하여 정배돼 죽음)·심 판서(沈判書) 액(詻)·이 참판(李參判) 명준(命俊)이 영덕(盈德)과 영해(寧海) 등으로 귀양 왔는데, 공이 영덕 수령으로 있을 때 종유하며 담론하면서 정의가 매우 친밀하였다. 그리고 심상(沈相) 일송공(一松公)이 일찍이 부사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아드님의 지론(持論)이 공평하고 바르니, 축하드릴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향리에 있을 때에는 아(雅)와 속(俗) 사이에 잃은 것이 없었고, 늙은이를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였으며, 선을 행하는 사람을 가상하게 여기고 능하지 못한 사람을 긍휼히 여겼다. 길흉과 환란에는 구제함에 방도가 있었고, 빈객의 왕래에는 응접함에 마땅함이 있었다. 재능이나 처지, 나이나 지위로 남에게 더하지 않았고, 사물을 접하고 처리할 때에는 너그럽고 공평함을 힘써 따랐다. 혹 따르는 것에 눈이 멀어 논의가 어긋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곡진하게 비유하고 깨우쳐 대도에 이르도록 하였다.

유도(儒道)의 중요한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마음을 두어 자임하였다. 남계서원(蘫溪書院)은 유현(儒賢)을 제향하는 곳인데, 갑론을박의 논란이 있어 영남 우도의 선비들이 무리를 나누고 이견을 세워 동계(桐溪, 정온)를 헐뜯고 배척하는 자가 생기는 지경이었는데, 공은 동계를 부호(扶護)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덕천서원(德川書院)도 옛날에 또한 대립해 서로 공격하는 일(주: 1651년 남명집 훼판사건)이 있어서 전후로 원장과 장의(掌議)가 된 이들은 대부분 배척당하였는데, 공이 원장이 되어서는 과격하지도 추수하지도 않아 조절하여 진정시키니, 무리들이 따라서 안정되었다. 의령(宜寧)의 덕곡서원(德谷書院)과 합천(陜川)의 이연서원(伊淵書院)은 모두 대현(大賢)을 제향하는 곳인데, 여러 가지 일들을 처음 시작하여 기해년(1599, 선조32) 봄에야 비로소 승격을 청하여 국학(國學)이 되었으니, 공의 노력이 많았다.

평소 배우는 사람들을 만나 가르칠 때 문 앞에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늙어서도 더욱 독실하였다. 혹 가난하여 능히 오래 머물 수 없는 사람이 있으면 입히고 먹여 주어 공부를 마칠 수 있게 하였는데, 뒤에 문명(文名)을 떨쳐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아, 공은 시례(詩禮)의 집안에서 태어나고 걸출한 자질을 가져서 문학과 정사 둘 다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다. 벼슬길이 이미 열리고 나서 임금의 계책을 윤색하고 조정의 책략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겨우 한 고을 수령을 맡겼으니 진실로 그 재능과 학식을 펼치기에 부족하였던 것이 바로 첫 번째 불행이었고, 광해군을 섬기고 간사한 재상(주: 영의정 정인홍)과 가까이 하여 약유(若濡)의 노여움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 두 번째 불행이었다. 그리고 몇 대 뒤에 종사(宗嗣)가 엎어지고 끊어지는 화가 있게 되니 후대에 문호를 유지 못한다는 경계가 되었다. 그러나 도촌공(陶村公)은 이미 스스로 야하인(倻下人, 주: 정인홍)과 길을 달리 하였고, 이재공(頤齋公, 주: 조우인)은 서궁(西宮)의 변고 때 시안(詩案)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하였다. 공은 아버지와 스승에게 일찍 전수받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능히 흉론(凶論)에 항거하다가 외직으로 배척당하게 되었고, 권간(權姦)을 거슬러 화기(禍機)를 밟으면서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쾌쾌(夬夬)는 허물이 없다는 것은 실로 이미 날을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공은 동계(桐溪) 문간공(文簡公, 주: 정온)에게 대해 나이가 형으로 섬길 입장이었으나 마음은 스승으로 사모하였다. 그 출처의 의론은 성세(聲勢)가 서로 의지하였기 때문에 선공의 장례에 동계가 실제로 묘갈명(墓碣銘)을 지었고, 공이 동계에 대하여 칭술한 것은 대개 동계를 북두 이남에 한 사람 밖에 없다고 하였다. 영남 우도의 제현들이 용산(龍山, 주: 동계 정온이 조직한 안음 가북면 용산리 '범국회·泛菊會')에서 수계(修稧)할 때에는 한 때의 명망 있는 선비들이 다 모였으니, 지금 그 계안(稧案)이 갖추어 있다. 그런데 공(公, 주: 조정립)과 동계(桐溪, 주: 이조참판 정온, 현손이 1728년 무신혁명 핵심 인물인 정희량)만 유독 이름을 적지 않고 선생이라고 적었으니, 당시 사론(士論)이 귀중(歸重: 중요한 것을 쫓음)한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불행이라는 것은 혹 사람에 달렸고 혹 하늘에 달렸기에, 공(주: 조정립)이 반드시 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또한 동계도 능히 면하지 못했던 것이니, 공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처음 공이 돌아가셨을 때 맏아들 군수공(郡守公, 주: 양산군수 조시량)이 벌써 공의 사행(事行) 한 통을 기록해 두었는데, 후손 계달(啓達, 주: 조시적·曺時迪 7세손, 조한지·曺漢支 증손)석형(錫衡, 주: 조시건 9세손, 조명현·曺明顯 현손)씨가 그것을 가지고 긍섭에게 보이며, “행장을 지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긍섭은 다 읽고 일어나 “이것 자체로 행장이 되기에 충분하니 거듭 행장을 지을 것이 없고, 또 못난 제가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두 군이 “비록 그러하더라도 실로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긍섭은 사양할 수 없어 삼가 그 원본을 살펴 위와 같이 기술하면서 감히 한 마디도 꾸미지 못하였고, 또 마음에 느낀 점을 붙여 훗날 병필가(秉筆家)들이 살피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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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목사 오계 조정립 및 숙인 안동권씨 묘소(상하분)다.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 고견사 앞산 3번지(893㎡)에 있다. 상주 사벌면 출생인 6촌 동생 조정융(曺挺融, 1598~1678, 정선군수)이 묘갈명을 지었고, 합천군 쌍책면 출생인 탁계 전치원(濯溪 全致遠, 1527~1596)의 증손인 전기정(全氣正, 1633~1697, 진사)이 비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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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목사 오계 조정립 둘째 아들 통덕랑 조시윤(曺時胤, 1616~1688)과 의인(宜人) 한양조씨 묘소다. 안양시 석수1동 산45번지 일원 유유제약 부지 내 호암초등학교 위 삼성산에 있다.

왕족인 이원길(李元吉)이 1622년 4월 18일 조난서(曺鸞瑞)와의 노비 상송(相訟) 문제로 안산(安山)에 갔다가 안산군수 홍유환(洪有煥)에게 결박되고 곤욕을 당했다. 평양판관 권득경(權得慶)의 사위인 홍유환은 윤좌벽(尹左辟)의 손위동서였기 때문에 홍유환이 조난서 편을 들어준 게 아닐까. 왜냐하면, 윤좌벽조시량(曺時亮)의 장인인데, 조시량의 친동생인 조시윤(曺時胤)조난서에게 양자로 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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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부사 조하경(曺夏卿)과 숙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 부: 용안현감 한강韓崗) 묘소다. 안양시 석수1동 산45번지 일원 유유제약 부지 내 호암초등학교 위 삼성산에 있다. 조시윤(조시량 동생) 아들 및 며느리 묘소다.

합천군 묘산면 안성리 출생인 조시윤(曺時胤)은 화성시 매송면의 조송무(曺松茂, 고려 중기) 후손인 조난서(曺鸞瑞, 1568~1634, 합천군수)에게로 출계했다. 위 묘역에는 조시윤 아들인 조하경(曺夏卿, 1635~1710, 순천 및 장단부사) 묘소도 있다. 조시윤은 아들 둘을 뒀는데, 순천부사 하경(夏卿)과 진사 하형(夏亨)이다. 당시 조난서 서울집은 왜관동(倭館洞: 현 인현동 근방)에 있었다.

특히 조하경 장인은 용안현감 한강(韓崗, 부: 韓師德)이고, 처외증조는 계해정변(인조반정) 후 관작삭탈된 우의정 조정(趙挺)이며, 조하경 처 조부인 주부(主簿, 종6품) 한사덕(韓師德)은 1618년(광해10) 폐비정청에 참여했다. 조하경 사위는 감역(종9품) 이부명(李孚命)인데, 이부명은 노론의 거두인 좌의정 소재 이이명(疎齋 李頤命, 1658~1722)의 형님이다. 즉 조하경이부명 아버지인 이조참판 이민적(李敏迪)과는 사돈지간이다.

<위 사진(4장) 출처: 안양 거주 조시윤 후손 조성현 블로그>

通訓大夫行定州牧使梧溪曺公行狀 癸丑

公諱挺立字以正。昌寧之曺。系出新羅太師諱繼龍。麗太祖時有諱謙官大樂丞。尙公主。其後有爲平章事者八。後仍蟬赫。至諱繼衡。當 燕山 中廟之際。官至戶曹參判。是生諱彥弘副司果。是生諱夢吉牧使 贈左承旨。是生諱應仁。有儒林望。官至大丘府使號陶村。娶全義李氏軍資監正 贈承旨得蕡之女。以萬曆癸未八月日。生公于陜川里第。公生有異質。承襲庭訓。自髫齔器度已成。甫冠受業于從叔頤正先生友仁。涉獵經史。文藝超達。尤長於詩。弱冠屢捷鄕解。中乙巳司馬。登己酉增廣第。聲華大發。初除成均舘學諭。自是歷剔淸要。在兩司則正言持平獻納掌令。春妨則說書司書文學弼善。舘職則修撰校理兼知製 敎。所居咸稱職。然自癸丑以後。朝論携貳。國是顚錯。士大夫有識者多與邪黨立異。公與弟府使挺生。惟正人之爲歸。丁巳冬凶論起。謀幽廢大妃。公爲獻納。與司諫南以俊,持平金昈,鄭良胤一時抗䟽。光海盛怒。論以不忠。幷命補外。公出爲北靑判官。戊午秋。以北聳遞西北文官守令。光海猶蓄前怒。四人者皆徙補南邊。而公得盈海縣令。府使公時知大丘府。有僞賊失捕事。始府使公與倻鄭同郡居。盖嘗師事之。後見其爲爾瞻所賣。卽投書曰近觀廣昌所爲。眞是小人。且焉有身處山林而締結權要。能卒保令名者乎。不如早與之絶。之子姪以其書示爾瞻。爾瞻固已心銜之。己未逆造按嶺南。希爾瞻旨欲甘心焉。適有僞賊朴致毅者。或言致毅匿大丘之公山。因羅織以故縱致毅。逮繫府使公王獄。半年乃得解。之子姪復以書嗾爾瞻曰必去曺某父子。然後南中士論可一也。府使公自是擯不用。而公在盈德六年不召還。盖姦黨不欲其立朝也。癸亥改玉遞歸。甲子丁府使公憂。自後家居十餘年。丙子冬北虜入都。公聞亂勤王。明年春至都下。始拜工曹佐郞(조정융 찬 묘갈명에는 工曹正郞)。旋除平壤庶尹。州道於虜初經兵火。公私赤立。公焦勞撫集。未期按堵如故。府庫有儲。時西路多事。簡書旁午。巡察使有煩劇難理者。必以屬公。公剖析悉當理。府有一死獄囚。已誣服當刑。公疑其寃緩之。竟得正犯誣者。自方伯以下皆神之。由是使盖往來。譽聞交道。居五歲秩滿。入爲軍資監正。旣而出牧星州。時朝廷欲遷秩重用之。備局爲擬萊伯。命未下尋遞還。乙酉拜潭陽府使不赴。明年除軍器寺正。未幾出牧定州。路由平壤。闔境父老迎送恐後。數百里供帳相望。在定一如所以治平壤者。報政爲一路最。準瓜期仍任一年。兩府人皆立石思之。己丑以通禮拜密陽府使。亦不赴。自是歸臥田里。占一墅金鳳川上。有煙霞泉石之勝。每春姸秋朗。角巾杖屨。沿流上下。有時興到。約諸名流。搜歷境內淸勝。至則盤礴吟咏。山僧野老。不知其爲官人也。公少多疾病。攝養有方。晩復康健。年迫大耋。而聦明不衰。夜寐夙興。終日端坐。人未見有倦意。及疾革。神精了了。囑子弟後事一如平昔。乃沒。實 顯宗元年庚子九月十七日也。享年七十八。以其年十二月三日。葬于居昌見巖山子坐之原。夫人安東權氏縣監瀁之女。甚有婦德。先公三十三年沒。生二男三女。男長時亮文科郡守。次時胤出后。女長適水使李敏發。次適士人李瑑。次適士人金蓍。繼配慶州金氏贈參判德民之女。生三男二女。男時迪主簿,時邁主簿,時建通德郞。女適李敏行。次適趙斗佑。后配坡平尹氏。二男時說,時䢍。時亮二男夏全,夏賢。六女河濬(주: 河浚의 오기),李桌(주: 李卨+木의 오기), 金東弼,李聖虎,呂用和,趙泰胤。時胤二男夏卿文科府使,夏亨進士。一女李相一。時迪三男夏明武科,夏徵,夏彬。時邁一男夏振。時建三男夏英,夏根,夏龜。時說二男夏瑞,夏聖。時䢍一男夏植。曾玄以下不能盡錄。公天賦純仁。器宇弘重。宅心以忠厚而不設畦畛。持己以謙謹而不爲崖岸。動止必周詳。辭氣必安靜。慮事必究厥終。出言必顧其行。事父母愉色婉容。務得怡悅。侍側終日。未甞有惰氣慢辭。處兄弟情愛篤至。分多潤寡。不校利害。尤謹報本。膳具必親視致潔。有新物必薦。俗節必上墓展謁。至耄耋不懈。大小祀享。匪疾病必躬奠獻。待族黨婣睦無間。御羣下恩威兼施。以至臧獲皆得其歡心。取友必擇所與。不以死生窮達有少改。於淑慝向背之間。雖未甞太厲聲色。而所與神輸氣入者。皆一時善人君子。其在北靑也。白沙李相公以獻議謫居是府。一見歡若平生。其卒也爲詩文以哀之。多人所不敢言者。徐判書渻,金判書時讓,沈判書洛,李參判命俊。編管盈寧等地。公之宰盈也。從遊談論。情好甚密。而沈相一松公甞致書府使公曰令胤持論平正可賀也。其在鄕曲。雅俗無所失。老老而幼幼。嘉善而矜不能。吉凶患難。賙濟有方。賓客往來。接應有宜。不以才地年位加諸人。接物處事。務從寬平。或有昧於所從論議乖剌者。必委曲譬曉。使底大道。至於斯文重事。加意自任。蘫溪書院俎豆儒賢。而有甲乙之閙。嶺右士類分朋立異。至有詆斥桐溪者。公扶護洞老。終始不貳。德川院舊亦有角立相攻之事。前後爲長貳者多被排擯。公爲洞主則不激不隨。以賙鎭之。衆隨以定。宜之德谷。陜之伊淵。皆大賢妥靈之所。庶事草創。至己亥春。始得請陞爲國學。公之力爲多焉。平居接引學者。戶屨常滿而敎誘不倦。老而冞篤。或有貧不能久留者。爲衣食之。使得卒業。後以文名占科第者甚多。嗚乎。公生詩禮之家。負魁偉之材。文學政事。兩有具美。進塗旣闢。若可以潤色王猷。裨贊廟略。區區百里之寄。誠未足以展其器業。乃一不幸而事昏朝比憸相。不能無若濡之慍。再不幸而數世之後。宗嗣有覆絶之禍。爲後來門戶之戒。然陶村公旣自貳於倻下人。而頤齋公當西宮之變。坐詩案幾死。公於父師。早有所受之。故能抗凶論而至斥外。忤權姦蹈禍機而不悔。則其夬夬之无咎。固已不俟終日矣。公於桐溪文簡公齒後。兄事而心師慕之。其出處論議。聲勢相倚。故先公之葬。桐溪實爲之銘。而公之稱述桐溪則盖以爲斗南一人矣。至嶺右諸賢修稧於龍山。盡一時之選。今其案具在。而公與桐溪獨不名。書以先生。當時士論之歸重。卽此可見矣。若其所謂二不幸者。或係於人。或係於天。非公之所能必免。亦桐溪之所不能免也。於公何有哉。始公之沒。而胤子郡守公業已錄公事行一通。後孫啓達, 錫衡氏。持以示兢燮曰願有以善狀之也。兢燮讀卒業而作曰。此自足狀。無用疊狀。且眇劣之所不敢也。二君曰雖然固以請。兢燮辭之不得。則謹案其本而撰次之如右。不敢有一辭之華。且附所感於心者。以俟他日秉簡者攷焉。

(1728년 무신혁명 대장군 휘 聖佐 8세손 曺濽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