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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태복경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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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제일 부자이며, 청남의 돈줄 조하주(曺夏疇)가 지은 사적기(事蹟記)와 한시(漢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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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竹先生 작성일25-12-30 17:47 조회89회 댓글0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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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주 6대(7세)조인 좌부승지 창성군 조계형(曺繼衡, 37세) 초상 원본이다. 본래 아래 이미지 처럼 칼러인데 흑백으로 현상(現像)했다. 1506년(중종1) 정국공신 4등에 책록돼 중종 임금이 하사했다. 97.5㎝×188㎝, 위 원본은 근래에 분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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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부승지 창성군 조계형(37세) 초상이다. 1506년(중종1) 정국공신 4등에 책록돼 중종 임금이 하사했다. 97.5㎝×188㎝ <사진출처: 매호 창녕조문(曺門)이 상주박물관에 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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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상주시 사벌국면 매호2길 29 경모재(景慕齋)다. 좌부승지 창성군 퇴우당 조계형(昌城君 退憂堂 曺繼衡, 1470~1518) 선조를 모시는 사당(祠堂)이다.

 상주 사벌 매호 출생인 매호 조하주(梅湖 曺夏疇, 1650~1725)는 창성군(昌城君) 퇴우당 조계형(退憂堂 曺繼衡, 1470~1518, 좌부승지)의 7세(6대)손이다.

조하주는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의 자형이며, 1728년(영조4) 3월 무신혁명(戊申革命, 이인좌의 난) 경상좌도 핵심 인물인 조경강(曺景江, 아들: 조세추)의 아버지이고, 조세추(曺世樞, 1703~1728)의 조부다.

특히 조하주는 영남 제일 거부(巨富)이면서 청남(淸南, 윤휴 등)의 돈줄 역할도 했다. 호남 제일 부자는 무신혁명 실패 후 처형된 나만치(羅晩致, 1679~1728, 고조: 나덕준)였다.

□ 퇴우당 사적기(退憂堂 事蹟記): <출처: 창녕조씨태복경공파 자료실>

*자료실 내용 중 오류라고 판단한 부분을 수정했다.

우리 조(曺씨)는 본관이 창녕(昌寧)이다. 6대(7세)조 휘 계형(繼衡)은 자가 평보(平甫)인데, 조선 성종 원년 성화(成化) 경인(1470)년 5월 5일 (단오·端午)에 함창(咸昌)에서 태어나서 살았다. 13세 때 비로소 양정공 난재 채수(襄靖公 懶齋 蔡壽, 1449~1515)에게 수학하였는데 부지런히 글을 읽어 게을리 하지 않았다. 17세 때 「중니일월부(仲尼日月賦)」를 지어 여러 사람이 보는 향시(鄕試)에서 1등했다.

자라서는 문광공 홍귀달(文匡公 洪貴達, 1438~1504, 8세손: 무신혁명 실패로 처형된 홍익귀<洪益龜, 조부: 홍여하, 처남: 이인좌>)에게 학업을 마쳤는데 문광공이 매우 뛰어난 인재로 여겼다. 당시 동문인 효절공 농암 이현보(孝節公 聾巖 李賢輔, 1467~1555)나 정랑(正郞) 우암 홍충언(寓庵 洪彦忠, 1473~1508) 같은 사람들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중략)

연산군 원년인 홍치(弘治) 8년 을묘(1495)년에 진사시에는 장원을 했다. 당시 공의 나이 26세였다. 연산군 7년 신유(1501)년 문과에 장원했는데, 나이 32세였다.

공(公, 조계형)의 문장은 고상하면서도 예스럽고 간략하고 진실했다. 공이 지으신 「무하유향기(無何有鄕記)」, 「몽부(夢賦)」 「병서시(病暑詩)」 등 여러 편은 더욱 뛰어난 걸작이다. 그 밖에도 5천여 편이 있다. (하지만 저서는 전해지지 않음)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대교(待敎, 정8품)를 역임하고 병조 정랑(正郞) 겸 지제교(知制敎)로 옮겼다. 황해도 관찰사에게 내리는 교서(敎書)를 지어 바쳤는데, 연산군이 그 문장을 크게 아름답게 여겨 임금의 자리 앞으로 불러 어의(御衣) 한 벌과 은띠 하나를 하사(下賜)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참의(參議)에 승진했다가, 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겼다.

37세 때인 정덕(正德) 병인(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반정군에 가담하여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3등(실제로 4등)에 올라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경연 의금부사(經筵義禁府事)로 승진하고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다. 날짜를 채우지 않고 서열을 뛰어넘어 가정대부(嘉靖大夫) 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봉조하(奉朝賀)로 승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호조 참판이 되었다.

그후 당시의 여론에 거슬려서 반정 때 입직(入直)했던 승지(承旨)인 이우(李堣, 1469~1517, 조카: 퇴계 이황)와 함께 (1514년 중종 9년) 삭훈(削勳)되었다. -이우(李堣) 조카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이 이 사실을 들추어 잘못되었다고 하다가 1548년(명종3) 풍기 군수로 좌천(실록에는 이황이 좌천됐다는 기록 없음)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공께서 크게 탄핵을 당해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중중 13년 정덕(正德) 무인(1518)년 함창(咸昌, 상주)에서 일생을 마치시니, 향년 49세였다. 같은 고을 율곡(栗谷) 자좌(子坐) 언덕(공검면 율곡리 산 1번지)에 안장했다. (공신으로 책록될 때 하사하는) 전례에 따라 (1506년 중종 1년 37세 때) 초상을 그렸다.

증손과 현손 수대에 걸쳐 남은 음덕이 경향(京鄕)에 두루 통했다. (중략)

증손 탁(倬, 1552~1621, 묘소: 안동 풍산읍 만운리 종미골 산 118-6번지)은 서울(京, 묵사동인 현 필동 일원)에 살면서 가장 현달했는데, 별과에 장원하여 관직이 참판에 이르렀다. ‘착한 일을 하면 뒷날 후손들이 보답을 받는다’는 옛날 사람들의 말은 정말 헛된 말이 아니다.

신주(神主)는 제사지내야 할 대수가 다 끝났기에, 합천 종가(宗家, 조정립)로부터 지금은 상주(尙州) 여러 족친의 집으로 체천(遞遷, 신주를 옮김)했다.

공(公, 조계형)의 영정은 임진왜란(1592년)을 겪으면서도 보존되었는데 하나의 병풍으로 만들었다. 처음 (경상도) 예천에 사는 증손 승지 우인(友仁, 1561~1625)의 집에 봉안하였다가 나중에 합천에 사는 현손 헌납(獻納) 정립(挺立, 1583~1660, 정주목사 역임) 집(합천군 묘산면 안성리)으로 (1615년에) 옮겨 봉안했다. (1623년 계해정변 뒤 정립·정생 가문이 인근 내암 정인홍 문인으로 뜻을 같이 했다는 이유로 정배 또는 파직되는 등 어려움에 처하자) 신유(辛酉, 1621년, 오류임. 계해 1623년이 맞음)-무술(戊戌, 1658)년 사이에 또 (사벌) 매호의 매악산 남쪽 언덕에 옮겨 봉안해 오다가 (조계형) 8세(7대)손이며 (나 조하주 5촌조카인) 학생 경문(景汶, 1673~1728 무신변란 때 사망, 부: 조하징 1641~1705, 조부: 조시망 1608~1671, 고조: 조극인, 사위: 조인경(趙寅經))의 집 동쪽 밭을 터로 삼아 3칸 대청이 있는 집을 지어 영구히 봉안해 지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7세(6대)손 매호 조하주(梅湖 曺夏疇, 1650~1725)는 숭정 후 경인(庚寅, 1650)년 3월 생으로 이미 (57세) 백발이 되었다. 다행히도 선조(先祖, 조계형)와 같은 갑자인 경인년(庚寅年)에 태어났다. 또한 2백 년 전의 검은 머리를 한 (중종 1년 1506년 조계형 선조 37세 때) 모습이 담긴 영정에 절을 올리며 흠모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여러 후손들과는 아주 다르다.

(후손 조하주는) 가승( 家乘)을 삼가 살펴보고 그 줄거리를 모아서 선조의 사적을 잊지 않게 하려 한다. 선조(先祖, 조계형)를 그리는 후손의 심정은 다만 오언 율시(五言 律詩) 한 편에 들어있다.

시(詩)는 다음과 같다.

(정국)공신으로 책봉 받은 영정이 있어 / 冊功遺像在

매악봉 언덕에 새로 사우(祠宇) 지었습니다. (사우는 1728년 무신혁명 실패 후 없어짐) / 新宇岳梅嶸

선조(조계형)의 덕은 경인년(庚寅年, 1470년)에 탄강(誕降, 출생)했는데 / 先德惟庚降

후신(조하주) 또한 같은 갑자(甲子, 1650년)에 태어났습니다. / 後身亦甲生

받들어 고결한 용모를 모시고 / 薦羞陪玉貌

음식을 나누며 노래를 연주합니다. / 頒餕奏金聲

털끝만큼 욕되게 생각하지 않으며 / 毫毛思無辱

흠모하는 마음 길이 품겠습니다. / 羹墻永感情

(1706년 57세)7세(6대)하주(夏疇) 삼가 적는다.

위 창녕조씨 조경문(曺景汶, 7대(8세)조: 조계형, 5대조: 조몽상, 장인: 정도보) 사위인 상주 낙동면의 풍양조씨 조인경(趙寅經, 1692~1751, 5대조: 호조좌랑 조정(趙靖))은, 송시열-송준길을 문묘에 종사하는 걸 반대하는 1736년(영조12) 3월 12일 집단 상소(4700 여명)에 참여했다.

[청남(淸南)인 유학 조하주(曺夏疇, 1650~1725)의 아들인 조경회(曺景淮, 조세추 삼촌)는 상주 낙동면 조해(趙瀣, 1666~1734)의 둘째사위인데, 조경회무신혁명으로 정배지에서 사망했다. 유학 조해(趙瀣)는 호조좌랑 조정(趙靖) 현손(5세손)이고, 양산군수 조시량(曺時亮, 1603~1662, 증손: 무신혁명 조성좌) 막내사위인 조태윤(趙泰胤, 1642~1707, 부: 조균, 후처 백부: 미수 허목)의 9촌 조카다.

조인경(趙寅經, 둘째장인: 曺景汶) 9촌아재가 조해(趙瀣, 고조: 조정(趙靖))고, 조인경 할배뻘이 조태윤이며, 조태윤 증조부는 광주목사 가휴 조익(可畦 趙翊, 부: 조광헌)이고, 조익 형이 검간 조정(黔澗 趙靖)이다.

조경회(曺景淮) 묘소는 부모 '조하주-연안나씨(합분)' 묘소가 있는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산 68번지(23306㎡) 태현에 부모 묘소 아래에 있다. 조경회 손위동서 이홍인(李弘仁, 趙瀣 맏사위, 이인좌 삼촌)도 전라도 흥양현(興陽縣) 나로도(羅老島)에 안치(安置)된 뒤 사망했다.

또한 조정생(曺挺生, 1585~1645,창원부사, 고조: 조계형, 현손: 조정좌) 현손인 조한좌(曺漢佐, 1686~1724)의 차남 조명서(曺明恕, 1724.2~1790)가 조지경(趙志經, 1692~1734, 부: 조언강, 10촌동생: 조인경)의 딸에게 장가갔다.

이처럼 1728년 3월 무신변란 후에도 합천 묘산의 창녕조문(曺門)이 상주 낙동의 풍양조문(趙門)과 혼인을 한 것은 풍양조문(趙門) 역시, 폐고(廢痼, 관리가 될 수 없음)되는 등 이른바 '역적 가문'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리라. 위 조지경(趙志經, 사위: 曺명서)은 조정(趙靖, 1555~1636)의 6세손이며, 가곡 조예(柯谷 趙秇, 1608~1661)의 증손이다.]

조인경(趙寅經, 1692~1751)과 달리, 조계형(曺繼衡, 7세손: 조하주) 후손들은 1736년(영조12) 3월 '송시열-송준길 문묘 종사 반대 상소'에 1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1728년(영조4) 3월 무신혁명(戊申革命, 무신변란) 실패로 창녕조문(曺門)이 폐고됐기 때문이다. 조경문 12촌이 상주(함창)의 무신혁명 조경수(曺景洙)·경사(景泗)이며, 13촌조카가 합천의 조성좌·정좌·정임·덕좌·명좌다.

상주 사벌 거주 조경문(曺景汶, 1665~1728, 증조: 조정건, 고조: 조극인)의5대(6세)조가 조몽상(曺夢祥)인데, 조몽상 동생인 조몽윤(曺夢尹)의 아들이 조택인(曺宅仁, 1580~?, 4촌형: 조응인·우인·희인)이다. 조하주(曺夏疇, 부: 조시중, 생조부: 조정건) 생증조가 조극인(曺克仁, 생부: 조몽열, 양부: 조몽상, 현손: 조경문)인데, 조극인(曺克仁)조택인은 4촌지간이다.

특히 유학 조택인(曺宅仁, 1580~?)은 1610년(광해2) 3월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와 그의 문인들이 이른바 '한강선생변무소(寒岡先生辨誣疏)'를 작성하여 박이립(朴而立, 내암 문인)을 성토하는 상소를 300 여명이 연명하여 광해 임금에게 올릴 때 동참했다. 박이립이 정구를 '모역의 죄를 범한 몹쓸 자'라는 글을 유포했기 때문이다.

정구와 성주군 수륜 동향인 박이립은, 내암 문인이며 합천 숭산동 출생인 대사간 박이장(朴而章, 1547~1622)의 10촌동생이다. 1623년 3월 계해정변 후 집권 서인세력들로부터 중도부처된 박이립은 정배지에서 사망했다.

특이한 것은 조택인(31세)과 같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4촌형 (전)봉상시(奉常寺) 직장(直長, 종7품) 조우인(曺友仁, 50세, 우부승지)과 유학 조희인(曺希仁, 33세, 합천군수)은 1610년 '한강선생변무소(寒岡先生辨誣疏)' 상소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거다. 4촌형 유학 조응인(曺應仁, 1556~1624, 대구도호부사)이 남명-내암 문인이라는 것 때문이다.

[1728년 무신변란에 연루(?)돼 사망한 조경문(曺景汶, 1673~1728, 부: 조하징, 조부: 조시망, 증조: 조정건, 고조: 조극인) 두 사위 남명섭(南明燮, 안동 출생)-남국정(南國楨, 영해 출생)영양남씨다.

명섭은 1735년(영조11) 9월 안동 도산면 분강서원(汾江書院) 사액(賜額)을 소유(疏儒) 이진화(李鎭華)를 비롯한 윤천각(尹天覺), 김선(金璿), 이항춘(李恒春) 등과 함께 청한 인물이다. 또한 남명섭은 영양남씨 을유보(乙酉譜, 1765년) 서문을 썼다.

호조참판 조탁(二養堂 曺倬, 1552~1621, 6세손: 조세추)-죽산박씨(竹山朴氏, 1555~1586, 6세손: 조세추) 및 아들 이천부사 조명욱(栗村 曺明勗, 1572~1637, 5세현손: 조세추)-원주원씨(原州元氏, 1572~1628, 현손: 조세추) 묘소가 안동시 풍산읍 만운리 만운저수지 위 종미골 산 118-6번지(75,112㎡)에 있는데, 이 산(山, 학가산) 118-6번지가 풍산읍 매곡리에 많이 세거하고 있는 영양남씨 소유가 됐다. 1728년 3월 무신혁명 실패로 선산을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양당 조탁 신도비와 1728년 무신혁명(이인좌의 난)!' 참조: https://m.blog.naver.com/antlsguraud/221335885977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736년 3월 12일 '송시열-송준길 문묘 종사 반대 상소(4700 여명)'에 조계형(曺繼衡, 1470~1518, 좌부승지, 4촌동생: 조한필)-조한필(曺漢弼, 1486~1536, 강원감사) 후손들은 1명도 참여하지 못했다.

1728년(영조4) 무신년 거의(擧義)에 주도 세력으로 참여하여, 100 여명이 처형 또는 정배되는 등 풍비박산됐기 때문이다.

조인경(趙寅經, 장인: 曺경문)은 1728년(영조4) 3월 무신년 때 정희량-이인좌 봉기에 대적하기 위해 창의(倡義)했다고 하는 이른바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 1014명)에도 등재돼 있다. 1788년(정조12) 11월 작성한 무신창의록에 상주(尙州) 지역에는 창의자가 조인경(趙寅經), 이인지(李麟至, 부: 조하현·曺夏賢 손위동서 이재헌), 이증엽(李增曄, 장인: 조명좌 조부 조하현·曺夏賢, 11촌아재: 이인지) 등 165명이 등재돼 있다. 조인경(趙寅經)-이인지(李麟至)-이증엽(李增曄)이 이른바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에 등재돼 있는 건 합천 창녕曺門(조문)과 혼맥으로 엮여 있는 걸 상쇄하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으로 판단된다.

특히 위 이인지(李麟至) 장인은 처형당한 남원부사 윤이익(尹以益, 1616~?)이고, 이인지 막내사위가 대사헌 신식(申湜) 7세(6대)신일권(申一權, 1728~1802, 생부: 신창(申淌))이기 때문이다. 1728년 무신혁명(戊新革命, 무신변란) 때 충청병사로 추대된 신천영(申天永, 1690?~1728, 부: 신은(申垽), 10대조: 영의정 신숙주)은 신식 6세(5대)손인데, 신천영 5촌조카가 신일권이다. 충청도에서는 무신변란신천영의 난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상주(함창) 거주 창녕조씨(曺氏)는 1명도 이른바 무신창의록에 등재돼 있지 않다. 상주에 거주한 조하주 손자인 조경수(曺景洙)·경사(景泗)·경회(景淮)·경소(景溯)등 창녕조씨(曺氏)들이 1728년 무신혁명(戊申革命, 무신변란)에 대거 가담하여 처형 또는 정배되고, 이른바 역적 가문으로 폐고됐기 때문이다. 조경문(曺景汶, 1673~1728, 5촌당숙: 조하주)도 연루돼 처형됐다.

※유학 매호 조하주(梅湖 曺夏疇, 1650~1725, 생부: 조시중, 생조부: 조정건, 생증조: 조극인, 생고조: 조몽상)-계배 연안나씨묘소(합분)는 경기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산 104-2번지(1289㎡)에 있었는데, 조하주-연안나씨 후손이라고 하는 사람들(충주시 용산동 개인택시 조인현 등)이 나타나 아무런 말도 없이 2005년 경 충주로 몰래 이장해 갔다.

*블로그 '좌부승지 창성군 조계형 연보' 참조: https://m.blog.naver.com/antlsguraud/220897955945

(1728년 무신혁명 대장군 휘 聖佐 8세손 曺濽溶)